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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쿤에 대한 추가적인 노트

비판적인 철학자들은 언제나 과학자들의 무지몽매를 걸고 넘어진다. 그리고 이는 태도는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런 주장들은 꽤 지겹게 느껴진다. 다분히 기분탓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러한 주장들을 듣고 있으면 때때로 비판적인 철학자들이야 말로 과학이 아니라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하기도 한다. 마치 이들에게 과학은 메시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느낌은 과학은 진보하는데, 철학자들은 늘 과거로 회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수 있겠다. 쿤은 사실 과학이 과학인 이유를 진보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패러다임 내에서는 규칙은 정상과학시기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심지어 단일한 규칙이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위기가 도래하면 패러다임의 규칙이 중요해지고, 과학자들은 철학자가 되어 버린다고 말한다.


쿤의 주장들은 아주 매력적이었는데, 그러나 쿤이 나에게 어떤 새로운 생각을 준 것은 사실 딱 두 문장이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시간을 거의 모두 바치는 활동인 정상과학은 과학자 공동체가 세계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다. 과학 활동에서 성공의 대부분은, 필요하다면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공동체가 그 가정을 기꺼이 옹호하려는 의지로부터 나온다.” (Kuhn, Thomas. (2013). 『과학혁명의 구조』, 4판. 김명자·홍성욱 역. 까치, p.67)


아마도 여기서 과학자들이 ‘세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가정’이란, 과학자들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실재에 대한 과학자들의 자연철학일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의 성공이란, 실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능하도록 하는, 또는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무지몽매는 분명히 과학자들의 인식을 방해하는 미신일 것이다. 마르크스라면 과학자들의 무지몽매를 아마도 ‘물신성’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마르크스가 ‘물신성’이라고 비판할 과학적 기법(technique)에 의존함으로써 과학적 인식이 가능하기도 한다.


쿤은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패러다임은 필연적으로 순환성을 띠게 된다. 그룹마다 제각기 그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논증에 그 고유의 패러다임을 이용하기 때문이다’(p.187)이라고 말한다. 그의 과감한 고백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이는 그의 주장들을 매력적으로 만들어 놓는 핵심적인 장치다.


한마디로 말해서, 과학은 그리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정상과학시기에 풀리지 않는 수수깨끼나 예외적인 사실들은 패러다임의 실패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위기는 과학자들이 비로소 위기라고 인식했을 때, 그리고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개종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동안 풀리지 않던 것들을 해결하고 세계를 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주어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특정한 패러다임의 성공은 결국 과학적 실천 이면에 존재하는 특정한 철학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인식의 불완전함이 그에게 있어서 패러다임이 지속적으로 변화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되는 동학의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지적했듯이 그에게 과학은 진보하기 때문에 과학인데, 여기서 과학적 진보는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을 통해서 극적으로 성취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정상과학 내에서 나타나는 ‘퍼즐풀기’를 통해서도 진보한다. 또한 여기서 존재하는 과학적 인식의 불완전함은 놀랍게도 그를 상대주의나 유명주의가 아니라, 실재론자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나는 바스카 보다 그가 더 엄격한 실재론자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