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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독서노트: Kuhn, Thomas.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 2013



나는 오래전부터 종교에 대해 폄훼하는 말들을 싫어했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내가 자란 환경 때문이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보기에 과학적 행동에는 종교적이라고 밖에 표현하기 어려운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당장에 연구자는 자신의 가설을 믿지 않고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연구를 진행할 수가 없다. 그 인내의 시간은 때로는 예상보다, 지나치게 길어지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시간을 견뎌내는 것일까. 단순히 어떤 답이 나올지 궁금하다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재미나 호기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이는 지나치게 가학적인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금전적 유인으로도 완전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 금전이 목적이었다면, 단기적이고 상대적으로 결과를 내기 쉬운 연구를 택했을 것이다.


나는 바로 믿음이 없이는 이 행위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가장 과학적인 행위라고 일컬어지는 연구작업에서도 우리는 믿음이라고 밖에 설명하기 어려운 동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생각을 해왔다.


이 글에서 토마스 쿤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형식적으로 요약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쿤의 주장을 과학철학 입문서에서, 이언 해킹의 서문에서, 쿤 자신의 서문에서, 1장 서론에서, 역자의 해설에서,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정상과학이 출현하고, 퍼즐이 풀이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등장하고, 종국에는 과학혁명이 출현하기까지의 과정들에 대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생각보다 천천히 곱씹어볼 흥미로운 문장들이 많았다. 그는 과학사에서 등장한 풍부한 사례들로 자신의 주장을 예증하는데, 사실 이 내용들은 그다지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실제로도 그런 부분들은 빠르게 읽고 지나갔다. 무엇보다 좋은 문장들은 그러한 과학적 사례와 사례들 그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이들 문장들은 때로는 확신에 차있고, 또 때로는 주저하는 모습이 내비치는데, 내가 무엇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던 것들은 바로 이런 문장들이었다. 혹자들은 바로 이러한 문장들에서 쿤을 비판한다. 사실에 대한 문장과 규범에 대한 문장을 지나치게 자주 혼용한다는 비판이 그렇다. 그러나 쿤도 이에 대해서 후기를 통해서 언급하기를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맞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쿤은 상대주의자가 아니었다. 쿤을 상대주의자로 해석하고 싶은 이유들에 대해서 쿤이 공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명시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를 상대주의자로서 인식되게 하는 요인들은 많다. 그는 분명히 과학적 진보를 주장하고 상대주의에 대해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하나의 이미지로 간주하고 있었다. 1장에서 그는 이 책의 목적을 과학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기 위함이라고 선언한다. 이후의 장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그는 과학적 행동들에서 믿음이나, 임의성, 때로는 미학적 이유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두가지 입장 – 과학에 대해 상대주의적 입장을 배격하는 동시에 과학을 하나의 이미지나 임의적이고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묘사하는 것 – 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은 꽤 애매한 일이다.


이 애매함은 과학적 진보에 대한 시각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쿤은 과학의 역사가 지식의 누적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기를 책 전체에 걸쳐서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또 동시에 누적적 과정이 전혀 아닌, 과학적 혁명을 통해서, 여전히 과학은 진보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애매함에 대해서 쿤은 다소 특이한 전략을 취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바로 낱말의 의미를 조작하는 일이다. 내가 보기에 쿤은 과학을 하나의 이미지로 정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과는 전혀 다르다. 그가 보기에 패러다임에는 주어진 단일한 규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규칙들이 문제시 되는 것은 패러다임의 위기에 위치해 있을 때이다. 따라서 과학을 그는 이미지로 밖에는 정의할 수 없다. 과학적 진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진보와는 다른 의미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과학이 진보하는 이유를 묻는 것은 우문이다. 오히려 진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해답이다.


– 정확히 말하자면, 쿤은 진보라는 개념을 두가지로 각각 분류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정상과학 내에서의 진보이다. 정상과학 내에서는 퍼즐풀이만이 가능하고, 퍼즐을 풀기 위해 더욱 더 정교한 이론이 고안된다. 이것이 첫번째 의미에서의 진보이다. 그러나 그는 두번째 의미에서 진보를 언급한다. 그것은 과학혁명을 통한 진보이다. 이 진보는 분명히 지식의 누적적 과정도 아니며, 과거의 패러다임 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의 진보란 자기충족적인 것일 수 있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다른 한가지는 ‘순환성’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이 역시 쿤 자신은 약점이 아니라고 후기를 남기는 부분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쿤의 설명은 언뜻 과학에 대한 설명, 다시 말해서 과학적 패러다임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과학 연구자집단에 대한 설명으로 보인다. 물론 쿤은 이를 후기에서도 언급하고 있고 – 쿤은 이러한 특징을 자신의 약점이기 보다 강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 , 더불어 비판을 받기 이전에 본문에서도 다루고 있다. 


“패러다임은 필연적으로 순환성을 띠게 된다. 그룹마다 제각기 그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논증에 그 고유의 패러다임을 이용하기 때문이다”(p.187)


그러나 이 순환성은 애당초 그가 패러다임을 정의하면서 의존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그가 후기에서 남겼던 말들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바로 그가 순환성을 의식하면서도 동시에 패러다임과 연구자 공동체를 구분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그는 이 양자를 분리하면서도, 이 안에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본질적 긴장을 과학사의 역동적 원인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과학적 진보의 의미에서 자기실현적 성격을 언급했던 이유도 이와 유사한 듯싶다. 확실히 그는 믿음이라는, 종교적인 요인이 과학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변인으로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는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을 개종이라고 비유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 그는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것은 과학자들에 대해 설득에 성공하기 때문이며, 여기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편 기존의 패러다임에 남아있게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여전히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순환성에 대한 쿤의 문장들을 특히 경제학과 관련해서 생각하며 읽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시간을 거의 모두 바치는 활동인 정상과학은 과학자 공동체가 세계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다. 과학 활동에서 성공의 대부분은, 필요하다면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공동체가 그 가정을 기꺼이 옹호하려는 의지로부터 나온다.”(p.67)


나는 일전에 주류경제학의 철학적 배경을 말하고, 더불어 주류경제학의 성공은 무엇으로부터 연유된 것인지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쿤은 이에 대해서 나름의 답을 주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이런 문장들도 존재한다. 사실 최근 경제학계는 다음에서 나타나는 위기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나 모형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경우에는 규칙들이 중요해질 것이며, 규칙들에 대한 특유의 무관심은 사라질 것이다”(p.123)


“이런 종류의 비정상연구는 통상적으로, 그렇다고 결코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또다른 연구를 수반하게 된다. 특히 괄목할 만한 위기 기간 중에는 과학자들이 그들 분야의 수수께끼를 푸는 장치로서 철학적 분석으로 전향한다.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철학자일 필요도 없고 철학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정상과학은 독창적인 철학과 거리를 두며,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는 것 같다.”(p.179)


“경쟁적인 명료화의 남발, 무엇이든 해보려는 의지, 명백한 불만의 표현, 철학에의 의존과 기본 요소에 관한 논쟁, 이 모든 것들은 정상연구로부터 비정상연구로 옮아가는 증세들이다. 정상과학의 개념이 의존하는 것은 혁명의 존재라기보다는 이들 증상의 존재들이다.”(p.183)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쿤의 자연관에 대한 것이다. 쿤은 과학혁명이 자연까지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를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엄격한 실재론의 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연을 하나의 패러다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퍼즐들이 왜 그렇게 도전적이며, 패러다임 없이 수행된 측정이 왜 그렇게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드문가를 말해주는 이유이다.”(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