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노트

남성은 여성을 정말로 착취하는가

1. 나는 왜 이 글을 쓰게 되었나

남성은 여성을 착취하는지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할 수 있을까. 사실 기존의 여성주의 이론과 쟁점 등에 대해서 조야하게 나마 잘 개괄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기억을 더듬어보니, 잘 모르겠다. 내가 까먹은 것인지, 아니면 원래 나는 부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뿐일지, 모르겠다. 자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오늘에 와서 다시 하나씩 곱씹기에는 자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전혀 없다. 나는 생각을 단순하게나마 정리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성적 착취’라는 말은 사실 일상적인 용어이다. 착취(exploitation)라는 말을 마르크스적 어법에 따라,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잉여가치의 향유라고 받아들이는 한에서만, 어색하게 느껴질 뿐이다. 계급제도(hierarchy)라는 용어 역시, 단순히 마르크스적 의미에서의 계급(class)를 지칭할 이유는 없다. 이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형성된 위계조직이라는 의미로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흔히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성적 착취라는 것은 보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정치경제학의 맥락에서, ‘여성에 대한 착취’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2. 여성의 재생산노동

크게 세 가지로 쟁점이 구분될 수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여성의 재생산노동이다. 남성의 생산노동은 보통 임금을 통해 지불 받는다. 그리고 남성의 임금을 제한, 나머지 가치는 잉여가치로써 자본가가 전유한다. 한편, 여성은 생산노동 대신에, 재생산노동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화폐로 거래되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총생산에 집계되지도 않는다. 여성의 노동은 그렇게 경제학의 이면에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이 화폐로 거래되지 않는 노동은 남성 일반과 남성 가구주에 의해 착취되고 있는 것일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 생산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여 얻은 대가를 우리는 임금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재생산비용이라고 부른다. 임금은 재생산비용의 화폐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재생산비용은 남성 생산노동자 한 명을 재생산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가구단위로 주어지는 것이고, 남성 노동자와 그 피부양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며, 여성은 그것을 토대로 재생산노동을 수행한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에 대한 지속적 유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고, 이는 다음 세대의 노동자가 양육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이 수행하고 있는 재생산노동은 남성이 강제하여 그를 통한 유무형의 가치를 그들이 향유하고 있다기보다는, 자본가에 의해 수행되고, 자본가의 잉여가치 전유를 위해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착취는, 남성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기보다는, 자본가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 생각에 여성에 대한 착취는 남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기 보다는, 자본주의 재/생산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능, 다시 말해서 경제적인 기능이 존재하고 있다고 바라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재생산노동은 부단히 시장화 되어가고 있는데, 이를 여성해방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여성착취 역시 그저, 시장화되지 못한 문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3. 여성의 임금노동

둘째로, 임금노동의 현장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차별을 받고 있고, 그것은 임금격차에서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의 성폭력의 문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차후 세 번째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보다 경제적인 문제에 집중하기로 하자. 여성은 노동현장에서 특히 경제적인 문제에서 다양한 차별을 받는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고용과 임금, 그리고 보다 세부적으로 승진과 노동시간 등의 문제가 존재한다. 우선 논의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서, 고용과 임금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흔히 여성노동 문제에 있어서, 약간의 과장을 섞어 여성임금은 남성임금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정말로 사실이다. 50%는 아니지만, 대략 60% 정도 되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평균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고, 바로 이 ‘사회적으로 필요한’이라는 단서에 따라,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노동에 비해 저평가된다는 것이다. 흔히 여성노동자들을 두고, ‘반찬 값을 벌려고 나왔다’고 비하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이러한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여성노동이 저평가된 만큼, 그 가치를 남성노동자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류경제학에서의 관점을 비교하면, 이러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은 그 신뢰가 일부 훼손되는 것 같다. 주류경제학에서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다. 먼저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이전에 발생한 차별/차이와 노동시장에서 발생한 차별/차이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 따르면, 여성들은 일찌감치 어릴 때부터, 목표를 낮게 잡는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그렇다. 때문에 높은 연봉의 자동차 회사에 들어가기 보다는, 안정적이고 적당한 연봉의 교사가 되는 목표를 삼는 다는 것이다. 이는 성별에 따른 다양한 차별이나 차이를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노동시장에서 발생한 차이/차별로 인하여, 여성의 임금이 낮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경제학으로 살펴보면, 과대 추정될 여지가 있다. 우리는 먼저 간단한 선형 임금방정식을 설정하여 임금이 영향을 주는 변수를 추정할 수 있다. 그저 간단한 식일 뿐이므로, 수식 자체는 생략하도록 하자. 이에 따르면, 임금을 결정하는 여러 독립변수로 학력이나, 나이, 업무능력, 등과 함께 성별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견해에 따르면, 학력과 성별이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고, 특히 학력이 더 높게 나올 것이다. 간단하게나마 일전에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임금방정식의 계량검증이 보여주는 것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모든 임금차이가 성별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고, 학력이나 업무능력 등에 의한 것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여성이 학력이나 업무능력 등에서 남성과 다르기 때문에, 다른 만큼 제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에 만일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다르게 임금을 받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차별이지만, 이는 생산성에 맞는 적절한 임금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본가가 최적의 생산성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논리구조가 형성된다. 차별이 아니라 차이라는 것이고, 차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본가가 손해이므로 가능하지 않다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성별에 따른 차이는, 성별 그 자체에 의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로 직접적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차별은 사실 ‘여성이라서’라기 보다는, 여성이므로 양육을 해야 하기 때문에, 또는 여성이라서 양육을 위해 일찍 퇴근하려고 하기 때문에, 여성이라서 출산을 하고서 퇴사할 것이기 때문에, 등 노동시장 안에서의 차별이라기 보다, 다시 노동시장 밖에서의 차별로, 노동시장 내에서의 차별이라고 해석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논의가 길었기 때문에 잠시 정리를 해보자. 이렇게 길게 주류경제학에서의 해석을 나열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로 정치경제학에서 여성이 생산한 가치가 저 평가 되었고, 그것을 남성이 전유하고 있다는 주장은 주류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주류경제학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분명히 존재할 수 있지만, 이는 노동시장 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노동 자체가 저평가 되었다기 보다는, 여성노동은 적절한 임금을 받았으나,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여성이 고임금을 받을 수 있는 노동을 하기 위한 환경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애당초 재생산노동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앞서 논의하였듯, 남성에 의한 착취라기 보다는 자본가에 의한 착취라고 볼 수 있다.

4. 여성의 성노동

이 부분은 내가 이 글을 쓰면서 가장 유보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 만큼 가장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글을 계속 써보도록 하자. 우선 성노동이 무엇인지부터 잠시 언급해보기도 하자. 성노동으로는 가장 확실하게는 섹스부터, 가장 완곡하게는 성적 매력을 강요당하는 부분까지 존재하고, 이는 다시 아주 확실하게 화폐를 통해 거래되고 있는 부분부터, 화폐를 통해 직접적으로 즉시적으로 교환되지는 않지만, 금전적인 이득을 얻을 유인을 얻을 수 있는 부분까지 다채롭게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서는 다채로운 측면들에 대한 아주 복잡한 행렬을 구성해야 할 것만 같을 정도로 쉽게 논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 먼저 직접적으로 ‘성관계’를 강요 받는 경우와, ‘성적 매력’을 강요 받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2) 또한 만일 ‘성관계 서비스’를 매매하는 여성 성노동자가 존재한다고 할 때에, 그에게 착취는 이른바 알선자로부터의 착취와 남성 소비자로부터의 착취가 존재할 것이다. (3) 그리고 화폐를 통해서 즉시적으로 교환되는 것은 매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화폐로 즉시적으로 교환되지는 않지만, 금전적인 유무형의 이득을 얻을 유인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증여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만 구분해도 모두 8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매매와 증여라고 마치 성이 일상에서 거래되고 있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4) 쌍방의 거래라고 할 수 없이, 폭력과 강압에 의한 성적 착취도 널리 존재하고 있다.

하나씩 이야기해보자. 먼저 (1) 성관계를 강요하는 경우와 성적 매력을 강요하는 경우는 우리에게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모두 동일한 지반을 가지고 있다. (2) 알선자와 소비자는 어떻게 다른가. 내 생각에 알선자로부터의 착취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의미에서의 착취의미일 뿐, ‘성적 착취’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3) 아마도 마르크스에 있어서 착취는 매매에 의한 것이다. 단 그 자체가 당장 성노동에 있어서 핵심적인 테마는 아닐 것이다. 다만 여기는 복잡한 층위가 반복되는데, 성이 거래되는 한, 상호성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쁘게 말하면 기생성이고 (누가 기생충이고, 누가 숙주이건 간에 말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와도 유비되는데,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4) 마지막으로 성폭력은 남성이 여성에 대한 착취로 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이 착취나 계급이라는 표현을 굳이 마르크스를 준거하지 않는다면, 이는 얼마든지 가능한 표현이고, 이미 일상적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용례로 사용된다면, 지금까지 논의한 정치경제학적 준거는 전부 무화하고 그저 자본주의와는 무관한, 가부장제로서의 여성 착취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논의한 어떤 경우보다도 나는 오히려 덜 비판적이다. 내가 언젠가부터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은 가부장제로 기인한 남성 일반의 여성 일반에 대한 통제가 오래도록 존속해오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착취라고 불러야 할, 정치경제학적 이유를 별로 지지해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것이 내 생각이다. 


여기까지가 완전하게 정리되지 않은 나의 주장이고, 생각의 일부이다. 그리고 현재의 생각에 대해서 그렇게 확고하게 여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명하게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질문들에 대해서 의문점이 들었고, 때문에 그에 대한 여성주의적 반론들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 현재 내가 보기에, 내가 정리한 이 글은 여성주의의 쟁점을 너무 간단하고 협소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최근 여성주의에 관련한 여러 사건들이 터지고 있는 것 같다. 메르스갤러리 사건에서부터, 최근 일어난 데이트 폭력 사건 등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쓸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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