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노트

P씨 사건을 계기로 근래의 페미니즘 이슈에 부쳐


1.

민감한 주제라, 단지 몇몇 사람에게만 나의 속내를 말했었지만, 나는 일련의 페미니즘 관련 이슈에서 나의 생각은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다. 생각이 정리된 것이 아니라 문자로는 잘 표현해오지 않았지만, 내 생각은 어쨌거나 그렇다. 이 글을 쓰기까지 매우 오래 걸렸는데, 그 이유의 9할은 단순한 나의 게으름 때문이지만, 그 때문에 수십 개의 관련한 글을 시간을 두고 하나씩 읽어내게 되기도 하였다.

오늘은 박가분(이하 P씨) 사건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다. 이 문제가 조심스러운 이유는 여러 가지 많지만, 그 중의 하나는 나는 그에 대해서나 폭로자에 대해서나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 사적으로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며, 사건 그 자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알기 보다 오직 간접적으로만 추측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들 P씨와 폭로자에 대해서 사적으로 교류하며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는 직접 교류하고 있고 그들을 통해서 그들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왜곡된 채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내 주변의 지인들은 P씨, 그를 매도하는 분위기이고, 나의 지인 중 일부는 폭로자의 폭로가 사실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는 글을 쓴 바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P씨의 주장에 편을 들고 싶고, 이는 사건이 처음 발발되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P씨가 평소에 해온 수 많은 말과 글들이 어떠하고, 그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와 전혀 무관하게 그렇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내가 얼마든지 가해자 또는 가해지목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2) 또한 나는 이 세상에는 회색 지대(grey zone)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마지막으로, 그 모든 폭로와 증언들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P씨에 대한 인격적 공격을 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 우리는 얼마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또 가해자이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것이 폭로 당하고, 또 때로는 가해자만이 몰랐던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 피해자마저도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급진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아주 끔찍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부각시킨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상황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억압과 무력한 개인들의 무지함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페미니즘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을 위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러한 설명들은 효과적일 수는 있겠지만,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른 사건들이 아니라,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는 말이다. 폭로자의 폭로, 지지자들의 증언, 그리고 P씨의 해명 어디에서도, 나는 급진주의적 수사에서 사용될 법한 개념과 논리들을 적용하기에는 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P씨를 무작정 비난할 만한 사유들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성폭력이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고, 또 성폭력 피해 사실이 피해자중심주의에 의거하여 결정된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 의해 성폭력이라고 명명될 수도 있는 사건들 중에 어떤 일부의 것들을 성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나는 심히 의문스럽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할 것이다.

2.

연인관계나 또는 어떤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의심사건들은 가해지목자의 비정상적인 심리상태나 성격 등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페미니즘에서 늘 주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담론에서는 이를 권력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통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는 권력관계라기보다는 어떤 경우에는 그저, 정보 비대칭에 가깝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나는 여성이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순응을 훈육 받아왔다고 할지라도, 명백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 여성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순응하고 거부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에 사람들은 피해자 유발론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역시도, 페미니즘을 배워 본 적이 있고, 사실 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좋아했었다. 나는 꽤 여성적이고, 사실 남성중심적인 사회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왜 오늘날 이러한 사고를 가지게 되었을까. 이는 회색지대와 관련이 깊다. (더불어 나는 여성을 피해자화 하는 접근에 대해서도 회의적인데 본 글에서 이 문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급진주의적 수사는 몇몇 단순하고 아주 정치적인 개념을 통해서 세계를 해석하고는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오늘날 매우 이슈인 여성혐오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성혐오는 만연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성적 이슈가 여성혐오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모든 성폭행이 여성혐오로부터 기인하는가? 나는 비교적 소수의 경우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또는 모든 성적 대상화가 여성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을 전제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데이트 성폭력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발행된 책은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라고 하지만,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회색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고 그 피해사례도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색지대의 존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급진주의적 개념과 이론으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그와 같은 설명방식들이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명료함을 얻어낸 것만 같기도 하는데, 내 생각에 그 명료함은 정치의 영역에서 보여질 법한 찰나라고 생각한다. 급진주의적 수사는 아주 정치적인 만큼 선언적이고 그 만큼 구체적이지 않고, 개념적으로 모호하다. 이를테면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사전에서 여성혐오(Misogyny)라는 낱말을 찾아보았다. 사전에서 설명은 여성을 싫어하는 것으로, 페미니즘 이론에 따르면, 여성혐오는 다양한 방식으로 선언되어 왔는데, 성적 차별, 여성에 대한 폭력, 성적 대상화를 포함한다고 적혀 있다. 나는 이 말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동어반복에 모호한 사례들의 나열이 아닌가.

일례로, 나는 이번 여성혐오를 다룬 PD수첩에 대해서,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일군의 식자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방송 자체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에 비해서, 나는 PD수첩의 주장들이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판들은 대체로, 여성차별과 남성차별 사이의 비대칭성에 대한 주장이나 여성혐오 비판(?)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PD수첩 방식의 주장과 분석은 아주 일상적인 주장이라 더 새로울 것 없이 진부할 뿐이다. 하지만 그만큼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느끼는 것이 허구가 아니듯이 남성들이 느끼는 것 또한 허구가 아니다. 그리고 ‘여성 혐오’라는 개념은 그것들을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여성이 느끼는 차별의 실제성과 그 정치적 당위성 뒤에 숨고 있다고 생각한다.

P씨가 언급한 말을 조금 인용하여 다시 표현해보자면, 오늘날 이슈가 된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권위에 의했다기 보다는, 가부장제의 몰락에 관련된 것이다. 내 생각에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둘 다 이고,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이 둘은 부당하게 혼동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메르스갤에서 조롱의 대상은 가부장적으로 권위 있고 능력 있는 남성이 아니라, 무능하고 권위와는 거리가 먼 남성이다. 반대로 인터넷 상에서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남성들 역시, 자신이 얼마나 가부장적으로 권위 있는지 인정받으려고 하기 보다, 자신의 무능함을 위악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더 선호한다. 여성혐오는 그래서, 가부장제에 기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닌가? 이 혼동은 급진주의적 수사가 가지는 모호한 개념과 이론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여혐’이든 ‘여혐혐’이든, 이는 가부장제라기 보다는 인종주의라는 주장은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급진주의적 수사를 실제 존재하는 수 많은 사례들에 대해서 모두 적용하기에는 명확히 적용되지 않는, 모호한 잔여들을 남긴다. 개념적으로도 모호한 잔여를 남기지만, 실제 사례에서도 모호한 잔여가 남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가진 도구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모든 사건들의 실상이나 원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이미 마치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이번 사건에 있어서 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주 나쁘게 말하자면, 진영논리거나, 강박적인 도덕적 순결주의가 떠오른다. 당사자가 저렇게 부인하는데도 이미 가해사실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 지는 것이 나는 당혹스럽다.

개념은 과학적 방법의 핵심이다. 개념은 일종의 인식론적 조작이고, 궁극적으로 기존의 통념에서 인식할 수 없었던 인식을 새롭게 제공하며, 나아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이론을 구성하고, 이는 구성적 실재를 창조하고 하나의 진리를 제공한다. 그렇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인식론이고, 새로운 세계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비틀고 싶다. 이 말의 이면을 드러내고 싶다. 인식이라는 말은, 도구, 방법이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세계를 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따라서 방법은 복수일 수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정말 그 방법으로 모두 환원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로 방법일 뿐이다. 방법은 대상과 분리되어야 하며,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그 잔여를 남긴다고 생각한다. (OLS를 떠올려 보라. R-squared가 100%를 가리키는 순간 분모가 0이 되어, 모형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정교한 방법을 사용할 지라도, 회색지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그 틀로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나는 인간이 대상인 이상, 인간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3.

나는 대상과 방법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가 소련이라고 생각하고, 종종 주류경제학을 맹종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이것이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도 유사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메르스갤의 등장에 대해서 상당히 흥미롭게 생각하였고, 이에 대한 식자들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현재까지 언론에서 이 현상에 대해서 다룬 십여 개의 칼럼과 방송이 있었고, 거의 대부분의 비평들은 메르스갤에서 행해지는 ‘미러링’에 대한 예찬에 가까웠다. 특히 문제적이었던 한 칼럼(노정태, 「페미니즘을 위하여」, 경향신문, 2015.06.14.)은 메르스갤에 대한 예찬과 함께, 남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호소하였는데, 이는 아주 인상적인 것이었다. 여성차별 반대에 대한 정치적 정당성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페미니즘이나 메르스갤에 대해서 논의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페이스북에서 보여진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이는 ‘좋은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을 논하는 것의 정치적 부적절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이해와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것일 수 있듯이, 우리는 여권과 ‘좋은 페미니즘(?)’을 구분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메르스갤과 관련해서 페미니즘이 가지는 그 고유한 이론과 논리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여성혐오라는 개념에 대해서 논의할 때 언급했듯이, 나는 이는 여성차별 반대라는 혹은 여성 인권 향상이라는 정치적 당위성에 기댈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은 그러한 당위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진다.

특히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일본 전공투의 자아비판 관행을 보는 것만 같다. 이는 P씨 사건에서 폭로자 측에서 취해온 대응과도 유사하다. 혹자들은 언제부터인가 운동사회 내 성폭력 문제들이 법정으로 가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그렇게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법정으로 가게 되지 않으면, 어떤 방식을 소원하는가. 아마 운동 사회 내에서 자율적인 규제이고 이는 일종의 자아비판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일례로 H씨의 대응을 보라. 그는 자아비판을 수행했고, P씨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귀결은 한편으로 이는 현재 운동 사회 내에 마땅한 통치 체계가 없고, 현재 있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비유하자면 나는 이러한 상황이 세기말의 데카당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음울한 풍경은 앞서 내내 말했던 이론이 가진 모호성이 파국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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