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노트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150830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Fine, Ben; Harris, L. 1985[1979].  『현대 정치경제학 입문』, 3장. 김수행 역. 한울. pp.65-72. (원제: Rereading Capital)


파인&해리스의 『현대 정치경제학 입문』, 원제로는 ‘Rereading Capital’로 『자본』을 다시 읽자, 정도 되는데, 알튀세르의 유명한 『자본을 읽자(Reading Capital)』에 대한 반박을 위한 책이라고 한다. 실제 원서의 표지를 보면 알튀세르의 것과 유사하다고도 한다.


3장.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에서 저자들은 신리카도 학파의 관점과 근본주의적 관점을 대조하며 양자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 쟁점이 가지는 의의를 설명함과 동시에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여기서 책의 내용을 구구절절 다시 요약할 필요는 없겠으나, 간략히 상술하자면 이렇다.


신리카도 학파(고흐, 해리슨 등)에서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그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며 중요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생산적 노동자와 비생산적 노동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이 유사한 노동을 수행하며,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전형문제에서 이들의 해법이 가지는 결론과도 부합하는 것인데, 이들이 보기에 가치에서 가격으로 전형하는 것은 불필요한 우회이고, 따라서 가치의 항에서 발생하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사이의 질적 차이는 불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이 보기에 이러한 관점은 틀렸다. 이들이 보기에 이러한 접근법은 자본의 직접적 통제와 관리 하에서 노동이 발생하는지에 구분을 하지 않으며, 유용노동을 하는 지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을 하는지에 대한 구분을 혼동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저자들이 보기에 잉여노동과 잉여가치에 대해서 비역사적인 접근을 수행하고 있고, 질적 구분을 무효화 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장과 다르게 마르크스의 접근법과도 다르다.


한편 근본주의자들(불록, 야페, 호웰 등)은 가치와 가격의 구분을 중요하게 보고 있으며,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 역시 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몇 문장을 인용해보자. 다음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는 이유는 추후 서술할 것이다. 우선 그의 논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불록(Bullock[1973][1974])의 논문에서 사치재생산에 관한 문제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그는 생산영역에만 주의를 기울여 축적될 수 있는 형태로 잉여가치를 생산해야만 생산적 노동이라고 정의하려 한다. 여기에는 생산수단과 임금재(노동력과 교환될 수 있다)만 포함되며 사치재의 생산은 배제된다. 이렇게 정의된 생산적 노동은 마르크스의 개념(사치재생산을 포함한다)과 다르기 때문에 그는 몇 가지의 난제에 부딪치게 된다.”(p.69)


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사치재의 생산은 생산적 노동이라고 보았는데, 근본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불록(1973, 1974)은 사치재의 구분은 추상수준에 따라 다르다. 먼저 단순히 잉여가치의 생산을 설명할 경우에는 사치재를 마르크스와 같이 생산적 노동에 포함시키지만, 낮은 추상수준에서는 사치재는 축적될 수 없기 때문에 비생산적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저자들에 따르면 이는 그 비일관성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 이후 논문(불록&야페. 1975)에서 자신의 주장을 수정한다.


그러나 저자들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은 실로 손쉬운 것인데, 생산적 노동이란,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노동력 판매를 기초로 하여, 자본의 통제 하에서 생산영역에서 수행되는 노동만이 생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이들이 마르크스의 손쉬운 정의를 이탈하는 이유를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신리카도학파에게 착취되는 노동은 모두 생산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잉여가치가 잉여생산물의 형태로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근본주의자들에게 축적가능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만 생산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잉여가치가 축적의 형태로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필자가 요약하는 과정에서 생략하였지만, 정부고용인에 대한 논의를 다시 언급하면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은 계급투쟁의 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라고 끝맺는다. 이러한 주장은 꽤 흥미로운데, 신리카도학파의 주장이나, 근본주의자의 주장은 한편으로, 각각의 전형문제에 대한 해법이나, 혹은 그 외의 경제학적인 설명방식에 부합되는 설명방식으로, 즉 경제학적인 분석적 이점이 존재하는 해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저자들은 생산적, 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구분을 계급투쟁의 한 요소로 바라본다는, 입장을 남기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서술하지 않았었지만, 저자들은 이러한 말을 첨언하기도 한다.


“생산적, 비생산적 노동의 구별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각각의 경제주체가 행하는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전부라고 보면 사회를 경제적 개념만으로 보게 될 것이다.” (p.71)


그런데, 여기서 앞서 언급한 69쪽의 인용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영어 원문을 확인해보지 못해서, 상당히 찝찝하지만, 어쨌거나 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사치재의 생산은 생산적 노동이라고 보았는데, 근본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본론』을 확인해보았다. 김수행 역, 개역2판을 확인해보았는데, (책 후면에 있는 인덱스를 확인해보면) 자본론 1-3권에서 생산적 노동은 4번 등장한다. (1권 p. 240, 683, 684, 801)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p.240)

“생산적 노동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단순한 노동과정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대해서는 결코 충분한 것이 못 된다. “ (p.240, 8번 각주)


“노동과정을 고찰할 때, 우리는 우선 그것의 역사적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을 추상적으로, 즉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을 취급했다(7장을 보라). 그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했다. “노동과정 전체를 ···(생략)···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같은 쪽의 주8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충했다. “생산적 노동에 대한 ···(생략)··· 결코 충분한 것이 못 된다.” 여기에서는 이 점을 더욱 상세하게 전개하려 한다. / ···(생략)··· 한 개인이 자연의 대상물을 자기의 생활을 위해 취득할 때는 자기가 자기 자신의 활동을 감독한다. 그러나 뒤에 가서는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감독을 받는다. ···(생략)···” (p.683)


“···(생략)··· 그러므로 노동과정의 협업적 성격이 더욱더 강화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산적 노동의 개념, 그리고 그 담지자인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도 확장한다. ···(생략)··· 집단적 노동자의 한 기관이 되어 그 부속기능의 하나를 수행하면 충분하다. ···(생략)···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산적 노동의 개념은 더욱 협소해진다. ···(생략)···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략)···” (p.684)


“자본가가 잉여가치의 일부로 자기 자신의 소비를 위해 구매하는 상품이 그의 생산수단이나 가치증식수단으로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자기의 천성적·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구매하는 노동도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p.801)


굳이 길게 여러 부분을 전부 인용한 이유는, 몇몇 구절들에서 앞서 말한 파인과 해리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들이 있고, 나아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다시 읽어도 좋을 법한 문장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일 마지막 801쪽 인용문을 보자. 사치재라는 단어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맥락 상 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사치재를 생산하는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라고 아주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건 파인과 해리스의 명백한 오류라고 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