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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노트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 후기


130827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 후기


1985년작, 카이로의 붉은 장미. 기대했던 대로, 우디 앨런은 영화의 경계를 허무는 방법을 사용했고, 애니홀에서처럼 관객과 대화를 시도한다기 보다는,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의 경계를 허물면서 웃음을 자아내었다. 곳곳에 등장하는 그의 위트를 이 글에서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차대전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헐리웃의 전형적인 문법을 잘 유지하면서도 조금씩 변형하고, 그것은 당대의 음악과 함께 풀어낸다(이를테면 스탠다드 팝).


주인공 씨실리아는, (아마 그 이름은, silly 라는 말을 변형한 것이 아닐까. 극중에서 그녀를 silly girl이라고 표현하는 대목도 있다.) 남편에게 폭력과 주정에 시달리면서 가난하게 사는데, 그녀의 유일한 낙은 영화이다. 그는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다섯번째 보다가, 어느날 영화에서 탐이 영화 밖으로 나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탐이 영화 밖으로 나오면서, 모든 것은 엉망이 되는데 그 엉망은 사실 다분히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환상 같은 것으로 그녀에게 펼쳐진다. 우디 앨런이 경계를 허물면서 영화적 문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면서 그가 해낸 것은 사실 낭만이자 환상이었음은 바로 영화에서 그대로 재생되는 것이다. 대사에서도 등장하지만, 이 엉망진창의 혼란이 지속되면서, 영화 속 배우들은 선포한다.


이제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지금 영화 속에 있지만, 이제 내가 현실이고 현실은 내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영화 속 환상이 절정으로 치닫는 동안, 다시 말해서 관객이 이미 영화에 몰입된 이상, 이제 현실과 환상의 구분은 더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화와 현실이 맞바꾸어지는 그 선언은 또 다르게도 읽혀지는데, 그것은 현실에 사는 씨실리아와 영화에 사는 탐 중에서, 무엇이 감독 우디 앨런의 자의식이 반영된 환영일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선언을 보자면, 그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때때로 우디 앨런은 씨실리아와 같은 영화에 푹 빠져 사는, 영화를 사랑하는 인물인가 하면, 또 때로는 탐처럼 순진한 이상주의자이자, 자신이 보는 세계는 오로지 영화 속 세계가 전부라는 듯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탐이 영화 속 영화인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조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탐이나 탐을 연기한 길은 자신의 배역을 무시하면 중요한 배역이라며 불같이 화를 낸다. 또, 씨실리아 역시, 가난하게 살면서 남편의 폭행이나 당하는 말하자면, 인생의 조연과도 같은데, 영화적 환상이 거듭해 나가는 동안, 아니 탐이 영화에서 극장에 있던 씨실리아에게 말을 거는 순간, 모든 것은 뒤바뀐다. 이제 모든 것은 탐과 씨실리아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들은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으로서 거듭난다. 영화에서 탐이 사실 조연이라는 사실은 반복적으로 지적되는데, 이를 보더라도 이는 다분히 감독의 의도에 다름아니다.


영화의 끝은, 슬프지만 새드엔딩이다. 씨실리아의 남편이 말한 바처럼, 여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하지만 언급하지는 않겠다. 굳이 영화적 낭만을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은 내가 일전에 비유했던 윤성호의 화법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다. 그는 환상을 결코 깨주지 않고, 오히려 그 환상은 영화 끝까지 지속된다. 아마 윤성호 감독의 단편 <두근두근 배창호>가 가장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닮은 영화일텐데, 윤성호 감독은 <두근두근 배창호>에서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허물면서 아주 매력적인 환상을 심어준다. 그것은 특히나 결코 낭만적이지 않고 오히려 차가운 영화가 현실 사이의 간극이 허물어지면서, 낭만적 환상이 생성되는데,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경우는 다르다. 특히 마지막 엔딩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우디 앨런의 것에서는 오히려 영화와 현실의 장벽은 마지막에서 다시 차갑게 나타나고 환상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매력적인 장면 중 하나는 바로 마지막에, 씨실리아가 영화를 보는 장면일 것이다. 환상이 깨어지고 울며 영화를 보러 온 그녀는, 영화를 보며, 결국 그 매력에 흠뻑 빠지고 미소지으며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