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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후기: 크지슈토프 보디츠코의 작품들



오랜만에 현대미술 전시(2017.10.09.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를 보고 온 기념으로 몇가지 코멘트를 하고자 한다. 다음은 크지슈토프 보드츠코의 작품들에 대한 몇가지 코멘트이다. 그에 대한 사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구체적인 부분을 여기서 다룰 수는 없다.


그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대상은 크게 거울과 수레를 통해 표현된다. 먼저 거울에 대해서 먼저 지적하자면, <자화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고개숙인 얼굴, 허공에 떠있는 얼굴, 마지막으로 거울에 반사된 그의 얼굴, 세가지 평면에서 그의 얼굴이 다각도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실재(실제라고 쓰던데, 나는 실재라고 쓰고 싶다), 허상, 마지막으로 (거울의) 반영으로 그의 모습이 각각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하나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상(象)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하다. 왜냐하면 <참전자 프로젝트>처럼 그는 실제 대상에서 허상 내지는 반영을 겹쳐놓고, 마지막으로 이를 공공장소의 관객들 어떤 관계를 통해서 치유라는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표현하는 다양한 미디어 아트에서 연속적으로 관찰되는 대목이다.


다시 ‘<참전자 프로젝트> 등’으로 되돌아가자. 공공기관 건물에 미디어를 통해 쏘아보내는 어떤 영상들은 손이나 눈 등 신체의 일부분이 왜곡된 채 겹쳐진다. 피해자의 손은 마치 건물을 토닥이는 듯하고, 피해자의 눈은 마치,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참고 있는 타자의 눈을 응시해야 하는 제3자의 숙명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토닥이는 손은 마치 치유받아야 할 피해자가 오히려 우리를 치유해주는 듯하고, 눈물을 참고 있는 눈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것처럼 소외된 타자를 ‘마주보아야’한다는 것 같다. 우리가 그를 진정 ‘이웃’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는 어디에서 연유되는 것일까.


여기서 알튀세르나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학을 떠올리는 것은 정당할까. 효과는 존재하지만 그 효과는 ‘부재하는 원인’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진정한 원인은 구조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자각한다면, 우리는 작가가 말했던, 실재와 허상, 그리고 반영 간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 아마도 작가는 이들 간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이 문제는 잠시 후술하기로 하고, 이제 기술에 대해서 잠시 화제를 돌려보자. 


미디어아트에서 기술이라는 주제를 떼어놓는 것은 짐짓 어려운 것 같다.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물론 <수레>이다. 수레는 앞으로 가거나, 뒤로 고꾸라진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간이 손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여기서 수레가 기술을 은유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물론 뒤로 고꾸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기술에 대한 낙관적 미래를 무조건적으로 예찬하고 있지는 않다. 기술은 인간의 삶을 전진시키거나 파국적으로 퇴보시킨다.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간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점은 기술의 물신성을 폭로하고 사실 기술을 작동시키는 것은 바로 인간의 노동이었음을 고발한다. 또한 전진만 가능한 수레가 그 자신의 고유한 선로를 이탈시킨다는 점에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사의 기관차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정은 그와는 아주 다를지 모른다. 아마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일 것이다.”


그러나 <노숙자 수레>에서 노숙자를 위한 수레를 개발한다는 점은 기술에 대한 단순한 낙관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개인적 도구>나, 그밖에 다른 미디어아트들을 비롯하여, 모든 작품에서 어떤 의미로 기술을 예찬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기술을 통해서 어떤 작업과 효과, 기대 등을 항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한 ‘수레의 방향을 인간이 직접 돌린다’라는 것은 기술에 대한 물신성에 대한 폭로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기술은 가치중립적일 뿐’이라는 주류적 관점을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이 비판은 나의 과도한 해석일까.


이제 다시 실재와 허상, 그리고 반영의 관계가 가지는 효과에 대한 문제로 돌아가자. 어떠한 효과의 원인이 부재하는 것처럼, 물론 이는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데, 작가는 이 관계를 예술을 통해서 바로 보이도록 드러낸다. 왜곡은 물론 바로 보이도록 드러내는 장치 중 하나이다. 이제 기술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생각을 이어갈 수 있다. 기술에 대한 다른 전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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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백남준의 작품전시를 보면서도 유사한 생각들을 가졌었다. 나는 사실 이번 전시에서도 유난히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떠올랐다. 미술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미디어아트라는 것이 대체로 이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사실 예술가에 대한 나의 반감,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대한 나의 반감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있다. 나는 이들의 반경제학적 사고를 싫어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나의 태도가 ‘예술 비판’이 아니라 ‘예술 비판의 불가능성’을 오히려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게 된다. 


얼마 전에 다시 봤던 우디 앨런의 <매직 인 더 문라이트>가 떠오른다. 거기서 마술사인 주인공은 이성만을 예찬하고 심령술과 같은 미신들을 증오하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한다.


“과학자들이 오히려 더 잘 속는거 몰라!”


슬슬 글쓰기가 귀찮아졌고, 할 말도 대충 했으니 그만쓰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