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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버스터 키튼에 대한 일기



어제부터 버스터 키튼의 영화에 빠져 버렸다. 현재까지 본 영화는 세편:


Buster Keaton. (1925). The Seven Chance

Buster Keaton. (1926). The General

Buster Keaton. (1928). Cameraman


버스터 키튼은 작년 여름 처음 알게 되었고, 그 무렵 <제너럴>을 보게 되었다. 그럭저럭 재미있게 본 것은 사실이었지만, 아주, 인상 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 <카메라맨>을 보고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아직 에른스트 루비치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다. 사실 나는, <카메라맨>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내가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제목에서부터 이야기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버스터 키튼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충분히 있었고, 또 <카메라맨>이 내 기대보다도 더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버스터 키튼이 좋아졌다. 앞으로 우디 앨런, 에른스트 루비치, 빌리 와일더, 조지 쿠커, 하워드 혹스 등과 같이 나의 어떤 목록에 추가될 것이다.


아마도 달리는 장면들은 버스터 키튼의 시그니처일 것이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항상, 그에게 있어서의 ‘용기’에 대해서 떠올린다. 특히 <제너럴>에서의 버스터 키튼은 전혀 주저함을 볼 수 없다. 우디 앨런의 <맨하탄>은 다분히 그를 참고한 것들일 것이다. 우디 앨런은 늘 삶에서의 용기를 말하기는 하지만, <맨하탄>은 가장 명시적이다. 오프닝에서 우디 앨런이 식당에서 친구에게 ‘용기’에 대해서 역설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서의 달리는 장면, 그것은 버스터 키튼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할 것이다. – 물론 <카메라맨>을 보면, 우디 앨런에서와 마찬가지로 버스터 키튼의 나르시스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아직 제대로 그를 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몇가지 생각들을 들게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이다. 사실 그의 영화에서 버스터 키튼이 어떤 측면에서는 늘 용기 있는 것만은 아니다. 어떻게 보자면, 좋아하는 여자에게 제대로 고백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용기없는 모습이라고 말해야, 올바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또는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면서 용기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단순히 영화적 연출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관심사이기는 하다. 그러나, 다른 것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방법들이 ‘비겁하지 않기’ 때문일까. 적어도 무엇인가를 부단히 시도하고 지속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늘 우당탕탕 문제해결과는 멀어지지만, 종국에는 다행히도 문제는 해결된다. 계속 시도하는 것을 두고 용기라고 느끼게 하는 것일까. 아직은 모든 것들이 가설적이다.


그의 영화에서 거대서사-로맨스, 남성-여성 등의 대당관계 등을 이중적으로 설정하는 것도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을, 뻔하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이다. 그러한 상징이나 은유이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맞지만, 현재로서는 그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쓰는 것은 번거롭고 무의미한 일 일뿐이고, 그저 그것들을 영화보면서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