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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에른스트 루비치의 영화에 관한 메모

근래, 특히 작년부터 우디 앨런에 빠져들면서부터, 영화를 꽤 자주 보고 있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잔뜩 본다음부터, 스크류볼 코미디나 고전적 로맨틱 코미디를 꽤 보았다. 특히 에른스트 루비치는 우디 앨런 다음으로 서서히 애정을 쏟고 있다. 에른스트 루비치도 이제 꽤 보았는데, 그간 봤던 것들에 대한 몇 가지 간단한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글은 그 개략적인 정리이다.


<The Doll>에서의 루비치 감독



먼저, 다음은 지금까지 본 에른스트 루비치의 영화목록이다. 현재까지 11편 보았고, 루비치가 감독한 영화가 총75편임을 감안할 때, 아직 극히 일부만 본 상황이다. 주요 흥행작을 다 본 것도 아니다.


1918    <I Don't Want to Be a Man>; 나는 남자가 되기 싫어요

1919    <Meyer from Berlin>

1919    <The Doll>; 인형

1919    <The Oyster Princess>; 굴공주

1927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 황태자의 사랑

1932    <Trouble in Paradise>; 천국의 말썽

1937    <Angel>; 엔젤

1939    <Ninotchka>; 니노치카

1940    <The Shop Around the Corner>; 모퉁이가게

1942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1943    <Heaven Can Wait>; 천국은 기다려준다


먼저, 그의 영화는 크게 둘로 구분해볼 수 있다. 독일에서의 영화와, 미국 헐리우드로 진출해서의 영화, 또는 무성영화시기와 유성영화시기로 구분할 수 있겠다. 미국에 진출한 것은 1922년이고, 그가 마지막으로 무성영화를 찍은 것은 1927년,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이다. 미국으로 진출한 이후로도 독일에서 독일의 제작팀과 작업을 했다고 하여, 어느정도 시기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연속선 상에 있는 부분도 있지만, 대략적으로 이 두 시기 그의 영화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독일에서와 미국에서로 시기구분을 하건, 무성영화-유성영화로 시기구분을 하건 대략 두 시기에서 그의 영화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그 변곡점에서의 영화들을 충분히 보지 않아서 그의 변모과정이 분명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나마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영화가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이다. 이 영화는 그가 찍은 마지막 무성영화이며, 미국으로 진출한 이후의 영화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자.


먼저, 간단하게 소재적인 면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하자. 그의 초기영화 특히 독일에서의 영화는 상당히 급진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가령, <I Don't Want to Be a Man>에서는 퀴어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가부장제를 희화화한다. <The Oyster Princess>에서도 가부장제가 그 희화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신분제 사회나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희화화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신분제 등은 그의 영화, 특히 초기영화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희화화의 소재이다. 이후 미국에서의 영화에서 이러한 급진성은 별로 찾아볼 수 없는데, 정치적인 주장을 간간히 보여주기는 한다. 가령 <Ninotchka>나, <To Be or Not to Be>가 그 사례이다. 각각 소련과 나치즘을 비판하는데,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미국 비판적 이데올로그의 전형으로 보인다. 또한 <The Oyster Princess>이나 <The Shop Around the Corner> 등에서 볼 수 있듯, 돈이나 계급 등이 농담의 소재로 쓰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전혀 급진적이지는 않다. 사실 꽤 반동적인 면모도 없지 않다. 그의 두 영화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노동자계층의 위안으로써 영화적 판타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조롱하는 대상은 희화화하지만, 동시에 대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마저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번에는 영화적 표현방식에 대해서 언급해보기로 하자. 나는 그의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와닿았던 것은 무엇보다 대사였다. 무성영화-유성영화의 특성상 그 양상은 다소 다르지만, 상대방의 말을 급작스러운 방식으로 받아치는 것은 그의 영화에서 일관적이다. 가령 <The Oyster Princess>에서 ‘굴 왕’이 딸에게 “왜 (자신에게) 신문을 던지냐”고 묻자, 그녀는 “꽃병이 모두 (던져서) 깨져버렸으니까요”라고 답한다. <Trouble in Paradise>에서는 가스통과 마담 콜레트, 그리고 릴리 간의 삼각관계가 극의 묘미인데, 여기서의 대사가 아주 인상적이다. 콜레트의 돈을 보고 그녀에게 접근한 가스통에게 콜레트는 흠뻑 반하는데, 모든 장면이 생략된 채로(성적 긴장을 표현하는 그의 흔한 방법이다), 콜레트는 가스통에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다시 “그래서 당신의 명성 따위 상관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며 그를 유혹하고, “당신 수법 다 알아요”라고 말하는 가스통에게 다시 “걸려들거잖아요”라며 다시 유혹한다. 이 즈음 영화의 모든 대사들은 한마디 한마디 마다 성적 긴장의 위계관계가 급작스럽게 변화한다.


그는 흔히 문을 통해 공간적 배경을 극단적으로 전개하는데, 이는 대사를 활용한 그의 극적 대비를 유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To Be or Not to Be>에서 극중 배우들은 나치군을 상대로 상관으로 연기를 하는데, ‘잠시 볼일이 있다’며 문을 열고 나가면 극장에서 배우들이 숨어있어 이제 어떻게 대응할지 회의를 한다. 문은 공간과 공간을 구분 지으며 상이한 공간들을 극적으로 배분하는데, 또 동시에 그것이 ‘문’이기 때문에, 금방이고 문이 열리고 비밀이 폭로될 수 있기에 극적 긴장을 제공한다. <Angel>에서는 주인공의 외도를 숨기고 긴장을 제공하는데, 응접실이라는 부르주아적 주거공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매우 빈번하게 나오는 것으로 <Angel>뿐만 아니라 흔히 등장한다. 이는 초기 무성영화에서도 나타나는데, <The Oyster Princess>이나 <The Doll>에서는 여주인공의 침실에 남주인공이, 또는 남주인공의 침실에 여주인공이 들어가 밀회를 한다. 


물론 이러한 영화적 장치들이 주는 극적 효과들은 관객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가령 그의 농담들이 농담일 수 있는 것은 관객이 존재하고 극중 인물들에게는 심각한 것들이 관객들에게는 희극적이기 때문이다. 문이 극적 긴장을 제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극중 인물과 배경을 전지적 관점에서 관찰하기에 문의 존재만으로도 긴장을 느낄 수 있다.


루비치가 이러한 효과를 잘 이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가령 <The Oyster Princess>에서 ‘굴 왕’은 두 주인공의 밀회를 엿보면서 딸이 드디어 사랑을 찾았다는 생각에 만족하는데, 결말에 가서는 관객을 향해 윙크를 한다. 두 주인공의 공간은 ‘굴 왕’이 엿보고, 이를 다시 관객이 전지적 시점에서 엿보는 구도를 가진다. 하지만 ‘굴 왕’이 관객에게 윙크를 하는 것으로, 감독의 존재를 등장시키고, 관객조차 감독의 관찰대상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관객의 반응은 감독이 마치 다 예상하고 의도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극중의 극을 배치하는 형식은 <The Doll>에서도 나타난다.  <The Doll>에서는 루비치 감독이 직접 극중 극의 무대를 설치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유성영화에서는 <Trouble in Paradise>는 마지막 결말에서 관객을 향해 웃는 가스통과 릴리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루비치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부가적인 것들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루비치 영화의 시기구분에서 그 변모과정이라고 생각되는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에 대해서 짤막하게 언급하고서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먼저, 루비치를 언급할 때 흔히 당대에 어려웠던 성적 표현에 있어서 과감하게 접근한다는 것이 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영화협회에서 금지하였다고 한다. 루비치는 성적 긴장에 있어서 주인공 간에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지 표현하되, 그 과정을 생략한다. 가령 <Trouble in Paradise>에서 방문을 열고 닫으며, 하인에게 “콜레트 부인은 저녁일정에 못 간다”라고 말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또한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배경이나, 복식 등에서 인물의 사회적 위치나 성격 등을 설명한다.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에서는 왕자가 학생교복과 왕족으로서의 복식을 입고 벗음으로써 상징을 부과하기도 한다. 배경음악에서도 영화적 상황을 잘 설명하는데, 이는 사실 영화에 있어서 일반적인 진술일 수 있다. 다만 좀더 영화의 절정을 음악 그 자체를 통해서 고양하고자 한다는 점은 추가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자. 이 영화는 그의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낭만적인 배경과 무드를 자극한다. 이전의 무성영화들은 실내를 배경으로 연극과 유사한 모습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무성영화지만, 배경의 규모가 넓어진다. 단순히 상황설명을 위한 배경 보다도 낭만적인 배경을 연출한다. 꽃밭에서 대화를 한다거나, 강가에서 뱃놀이를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Angel>, <Ninotchka>, <To Be or Not to Be>과 같은 유성영화들은 프랑스 파리와 같은 비교적 화려한, 특히 도시적 스펙타클을 간간히 보여주는 경향이 뚜렷한 편이다. 한가지 특이점을 더 언급하자면, <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는 새드엔딩이다. 이전 영화들에서 그의 영화에서 새드엔딩을 본적은 아직 없다는 점에서 특이점이라고 할 만하다. <Trouble in Paradise>도 다소 비극적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희극에서 드라마로의 장르적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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