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노트

후기: Woody Allen, <September>, 1987



우디 앨런의 영화들은 많이 봤지만, 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에서 이 영화만큼 좋은 영화는 없는 것 같다. 사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몇 편 있기는 한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자면, <인테리어>, <앨리스> 같은 작품들이 그런데, 나는 물론 이들 중에서도 단연 <9월>이 가장 좋았다. 러닝타임도 짧고, 이 영화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별로 없지만, 정말 재미있는 영화기에, 몇 마디라도 짧게 쓰고 싶다.


나는 이 영화의 가장 처음부터 좋아한다. 나는 이미 피아노 연주곡이 들리면서 시작하는 그 처음부터 좋아하지만, 미아 패로우의 ‘God!’하고 외치는 그녀의 첫 대사도 좋다. 문을 쾅 닫고 들어와서 문에 기대며 외치는 모습은 엄마와 싸우고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가 말하는 주근깨 시골 여자애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인 부분이 있다. 한편으로는 <한나와 그 자매들>에서 우디 앨런의 첫 대사, ‘Oh God she’s so beautiful!’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사소한 부분들은 영화의 곳곳에 있고, 유별난 영화적 장치가 없어도 많은 재미를 느끼게 한다.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 고유하고 풍부한 내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물들 간에 복잡한 관계에 얽혀 있다.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살피면서 이 관계들을 발견하는 것도 영화를 재미있게 한다. 이 영화는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에서 모녀의 갈등 구조를 차용하였다고 하는데 –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 비단 모녀 사이의 갈등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 간의 관계도 충분히 영화를 재미있게 한다.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정전으로 불이 꺼지고, 촛불을 켜고서 각자 어떤 일을 하는 모습을 다루는 부분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두 남자가 당구를 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핵물리학을 연구했다던 남자의 말은 핵폭탄 연구를 말하면서도, 사랑에 관해 은유한다. 그는 현재의 아내에게 ‘당신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그는 그 선택이 한편으로는 어떤 체념의 결과임을 보여준다는 점은 물론 애석하게도 낭만적이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 다음은 그 대사들이다.

“Look how much it’s cleared up. You can see a billion stars. It should be nice tomorrow. So tell me. Is it true you worked on the atomic bomb?”


“No. Diane tell you that?”


“Yes.”


“Not at all. I did one small, unrelated project at Los Alamos many years ago. But when she’s describing me to people. I’m the father of the A-bomb.”


“What branch of physics are you involved with?”


“Something much more terrifying than blowing up the planet.”


“Really? Is there anything more terrifying than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Yeah. Knowledge that it doesn’t matter one way or the other. That it’s all random. Originating aimlessly out of nothing and eventually vanishing forever. I’m not talking about the world. I’m talking about the universe. All space, all time, just a temporary convulsion. And I get paid to prove it.”


“You feel sure of that, when you look out on a clear night like tonight and see all those millions of stars? That none of it matters?”


“I think it’s just as beautiful as you do. And vaguely evocative of some deep truth that always just keeps slipping away. But then my professional perspective overcomes me, a less wishful, more penetrating view of it, and I understand it for what it truly is. Haphazard, morally neutral, and unimaginably violent.”


“Look, we shouldn’t have this conversation. I have to sleep alone tonight.”


“That’ why I cling to Diane and consider myself very lucky. She’s warm and vital and holds me while I sleep. That way I don’t have to dream of photons and quarks.”


당구가 우주, 그리고 사랑 같은 것들을 은유한다는 점은 명료하다. 소설을 쓴다는 남자는 끝내 자신의 사랑이 실패하고 떠나기 전까지 당구공을 서로 부딪혀본다. 나는 언젠가, 당구와 우주, 그리고 소통 같은 것들을 은유하던 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에서는 ‘쓰리쿠션’을 말했었는데, 나는 그 칼럼을 어릴 때 참 좋아했었다. 그 칼럼리스트가 이 영화를 봤던 것인 것, 아니면 당구의 은유가 흔하고 전형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언젠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우디 앨런을 꼽았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특히 우디 앨런의 <한나와 그 자매들>에서 화가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했다고 한다. 다른 우디 앨런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9월>도 여러 장면과 구도, 캐릭터 등이 그의 다른 영화들과 겹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한나와 그 자매들>에 등장하는 화가 캐릭터이다. <9월>에서는 물론 그 화가에 대응되는 캐릭터가 핵물리학자이다.


영화는 어느 순간 어떤 임계치에 도달했다는 듯이, 갈등이 고조되고, 어느 순간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그 갈등이 지나간 이후, 어느 순간 영화는 살며시 가을을 등장시킨다. 정말로 살며시, 그리고 갑작스럽게. 차를 끓이는 장면이 바로 그것인데, 이 영화 중에서 소소한 어떤 장치들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때 두 인물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옆모습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인테리어>에서 세 인물의 옆모습으로 끝나는 장면과 닮은 구석이 있다. 우디 앨런이 <인테리어>에서의 이 장면을 두고서, 의도적으로 꽉차고 불편한 구도를 연출해서, 인물들의 갈등을 보여주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나는 아직 분명하게 와닿지는 않지만, 일리 있는 부분도 있다.


영화의 핵심적인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다이안 위스트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도 영화의 중요한 묘미 중에 하나이다. 물론 그녀의 행동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그녀가 소설을 쓴다는 샘 워터스톤에게 빠져들면서도, 그에게 Flirting하는 모습들이다. 미아 패로우의 엄마 역할인 일레인 스트리치의 캐릭터도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나는 그녀가 Ouija board를 하는 장면도 아주 재미있지만, 그녀가 거울을 보는 장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그녀를 처음으로 관찰하게 만드는 장면은 샘 워터스톤과 대화하며 그의 기억력에 놀라며 팜 비치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노년의 모습이지만 재기발랄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사람 없이 단지 흔적만 있는 빈 집의 풍경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아직 이 장면의 의미가 분명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미아 패로우는 빚청산을 위해서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들(details)를 팔아버린다는 대사를 하는데, 그 풍경이 이 ‘details’를 의미한다는 것은 물론 당연하다. 그러나 단순히 그 흔적들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장면은 분명 집 안의 ‘구조들’을 보여준다.


영화는 이 건물내부의 구조를 활용하는 장면들을 자주 취한다. 가장 대표적인 부분은 내 생각에 다이앤 위스트가 샘 워터스톤을 꼬시는 장면들이다. 화면은 이때마다 어떤 것들을 ‘감추는 것’을 통해서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어딘가를 인물이 응시하지만, 그 대상을 보여주지 않거나, 인물이 어딘가로 가지만 그 장소는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가 실내의 정경을 보여주며 삶의 흔적들을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영화연출에 있어서 실내의 구조를 이용한 장치들을 사용한다는 것까지는 충분히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 이 장면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좀 더 의미부여를 할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테리어>를 다시 본다면,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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