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노트

후기: 톰 포드, <싱글맨>, 2009



다음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이 영화를 사실 ‘디자이너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았는데, 보고나니 ‘디자이너가 만든’ 영화였다. 초반부를 처음에 못본 탓도 있고, 때문에 영화를 처음 볼 때는 한참 헤맸게 때문에 전반적인 서사에 대해서 신경쓰기 어려웠다. 어쨌거나 영화를 다시 보았고, 여전히 온전히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글을 쓴다.


영화는 조지의 모습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지는 나체인 상태로 물 속에서 몽환적인 모습으로 있다. 그 모습은 헤엄을 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죽은 듯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마치 양수 속에서 있는 것 같지만, 근육질이고 역동적이다 – 물론 이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영상은 그의 신체 구석구석을 훑는다. 이 장면은 그 다음에 등장하는 짐의 죽음과 함께 영화에서 수미일관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다음 장면은 짐이 교통사고로 죽은 모습인데, 온통 하얀 설원에서 새빨간 피만이 색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조지는 죽은 짐에게 입을 맞추는데, 감정은 온통 절제되어 있다. 물론 이는 사랑하는 연인 짐을 그리워하는 조지의 악몽이다. 


시니컬하고 신경질적이며 반듯한 조지의 성격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는 연인을 잃고 자살을 결심하는데, 눈 여겨 봐야할 점들이 있다. 그가 타인의 삶을 관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가 몰래 숨어 관찰하는 화목한 이웃들은 웃고 있지만, 악의 없이 나비를 짓이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색채이다. 그가 보는 그 지독한 삶은 언제나 빛 바랜 듯이 톤다운 되어 있는데, 그가 강렬히 느끼는 탐미의 대상들, 또는 그 순간들에서만이 그 색채가 강렬해진다, 순간적으로. 예컨대 웃옷을 벗고서 역동적으로 테니스를 치는 남자들, 여자의 빨간 립스틱, 짐과의 행복한 기억들, 학교에서 만난 젊은 게이, 그가 색채를 강렬하게 느끼는 대상들이다. 그는 그 순간순간을 붙잡으며 현재를 살아가는데, 그 드문 순간들을 제외하면, 세상은 모두 이국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무척이나 탐미적이다. 영화는 탐미에 대해 이야기하며, 궁극적으로는 시선에 대해 말하고, 이를 한 남자의 통시적 시간대를 통해서 그려내지만, 은밀하게 이를 공시적으로 그려낸다. 주목할 만한 아이템들은 바로 눈(eye)과 시계이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대상들인데, 전자는 물론 탐미, 그리고 시선에 대한 은유이다. 여기서 눈은 ‘우리가 보는 눈’이기도 하고, ‘우리를 보는 눈’이기도 하다. 주차장에서 조지와 어느 스페인 출신 게이가 대화하는 장면은 아주 상징적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서로가 게이임을 알아보는 이들은 자연스레 몰래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는 장면은 덤으로 아주 재미있다. 어쨌거나 주차장 뒤의 간판에는 거대한 눈(시선)이 그려져 있다. 짐이 말하듯, 또는 케니가 말하듯 ‘우리들은 투명인간’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아무리 은밀히 숨어도 어떤 이들은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듯, ‘때로는 혐오스러운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 스페인 출신 게이가 황혼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다.


탐미에 대해서 한가지 더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조지가 탐미하는 모습은 언제나 단편적이라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부분 부분을 포착하는데, 전체를 탐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상이 화면상에서 왜곡된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컨대, 전체를 조망하는 낭만적 연출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다. 물론 이것이 실제 조지가 대상을 왜곡적으로 인식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그가 탐미하는 방식이, 그가 관조하는 ‘이웃들(예컨대 나와 같은 관객)’과는 다르다는 점을 시사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탐미의 방법이 남들과는 달랐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시계는 물론 조지의 신경질적인 성격과 불안한 심리를 연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8시쯤 전화를 받고, 9시쯤 출근을 해서, 12시쯤 수업을 끝내는 등의 시간대가 순서대로 짜여 있고, 그 시간 내내 그는 아주 신경질적이고 불안하다. 9시쯤 대학에서 동료들과 인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은 아주 사소하지만 그와 저들 사이의 어색하고 불안한 느낌이 숨이 막힐 듯하다. 이러한 시간 구조는 영화에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데, 이는 조지의 하루 또는 며칠의 시간을 보여주는 사적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이는 특정한 ‘시대(times, era)’를 의미한다. 이를 거시적으로 확장하는 순간, 조지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도 달라진다.


조지는 케니와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 3시즈음에 깨어나는데, 문득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고 그는 자술한다. 그는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오는데, 이미 밖은 검은 밤이고, 부엉이가 날아오른다. 그는 순간 순간을 붙잡아왔는데, 그것이 그를 생존하게 만들어왔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내심 이웃을 시샘하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탐미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등장하는 부엉이가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사실 그는 짐과 함께 책을 읽을 때도, 오디비우스의 ‘변신’을 읽고 있었다. 바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등장하는 그 책 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아버지와 잔 죄로 부엉이가 되었고, 그 수치심에 밤에만 날아오른다.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혜의 상징으로,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 등장하여,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고 한다. 그리고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조건이 주어진 이후에야 그 뜻이 분명해진다고 한다 – 물론 이는 마르크스가 ‘비판’에 대해서 서술하는 부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즉, 조지는 그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데, 이는 단순히 그가 ‘심장발작’을 앓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총을 버리고 심장발작으로 죽었지만, 이는 그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그가 죽어야만 했던 것은 바로 게이였던 자신을 혐오하는 사회의 시선이었고, 그를 죽인 것은 바로 사회였으며, 따라서 그는 자살하기 위해 총을 쓸 필요가 없던 것이다. 사실 그는 죽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자살한다고 하고서 자살하지 못해서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자. 또는 그가 행복한 이웃들을 시샘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사실 죽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1962년이라는 구체적인 시대상을 투영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물론 1962년이라는 것도 하나의 은유일 것이다.


다시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자. 그는 짐이 죽는 꿈을 꾸다가 깨어난다. 그의 침대에는 만년필 잉크로 다 번져 있는데, 그 만년필 잉크를 그가 입술에 가져다 댄다는 점에서, 이는 짐의 피와 입을 맞추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처음부터 이 영화가 한 남성에 대한 ‘자전적 은유’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침대에 잉크가 묻는 일은 자기 전에 일기를 쓰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수미일관적으로 짐과 조지의 입맞춤, 그리고 나체의 조지가 물속에서 내뿜는 몸부림이 각각 영화의 앞뒤로 반복된다. 나는 두 사람의 입맞춤 보다는, 그 나체의 모습에 더 눈길이 간다. 그는 마지 자궁 속 양수에 갇힌 것마냥 물속에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살고 싶다는 듯이,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살아있음을 마음껏 느끼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케니와 조지가 달밤에 수영하는 장면은 영화를 통 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는데, 두 사람이 알몸으로 마주하는 그 바다와, 영화의 양 끝에 위치한 그 물속은 아마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예전에 밴드 R.E.M.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 밴드의 보컬 마이클 스타이프도 게이였다. 개인적으로 R.E.M.의 음반 중 몇 개를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물론 가장 좋아하는 음반은 (가장 유명한 음반이기도 한) 1992년 <Automatic for the People>이다. 이 앨범에는 ‘nightswimming’이라는 곡이 있는데, 아주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이다. 케니와 조지가 수영하는 장면에서는 이 곡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여서. 아직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조지가 은행에서 한 아이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만큼은 강렬한 색채로 연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지, 아직 잘 이해가 안간다. 그가 탐미할만한 요소가 있었을까. 그 아이들이 사실 동성애자임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이는 '오스카 와일드'를 떠올릴 만한 에메랄드 색 옷을 입고 있고, 그의 오빠는 여자애처럼 '밝은 단화'를 신는다고 하니까. 그런데 왜 그 아이는 전갈로 잔인하게 곤충들을 죽이는 것일까, 도입부에서 나비를 죽이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한데, 정확하게는 이해가 안간다. 아이는 영화 <벤허>를 좋아하는데, 물론 이는 그가 그저 '기독교적 가풍'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겠지만, 기독교 가정에서 레즈비언과 게이가 자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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