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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메모: Woody Allen, <Midnight in Paris>, 2011



Woody Allen, <Midnight in Paris>, 2011


우디 앨런의 영화는 모두 다 보았지만, 사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렇게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다. 우디 앨런 영화 중에 재미없게 본 작품도 많기 때문에,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래도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았다고 할 순 있지만, 다른 영화들에 비해서 그리고 영화의 유명세에 비해서는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우디 앨런의 최근작 중에서 <블루 재스민>이나 <원더 휠> 같이 우울한 영화를 잠시 논외로 한다면, <미드나잇 인 파리> 보다는 <매직 인 더 문라이트>가 훨씬 좋다.


그래도 오늘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고, 간단하게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해보고 싶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길 펜더는 파리에서 1920년대 과거로 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동경하는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등을 만나고, 1920년대의 여성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지게도 된다.


우선 이번에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길 펜더의 소설에 대한 거트루트 스타인의 평가였다. 나는 이 평가가 마치, 우디 앨런의 ‘작가론’ 내지는 ‘감독론’처럼 이해되었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는 소설을 쓴다며 글을 계속 쓰고 고치고 하며 끝내지 못하는 캐릭터가 늘상 등장하는데, 이런 ‘작가론’ 같은 것이 명시적으로 나오는 영화들은 못 본 것 같다. 워낙 같은 이야기를 계속 하는 감독이므로,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헤밍웨이가 소개해준 편집자, 거트루트 스타인은 길 펜더의 소설에 대해서 호평하지만, 소설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적인 평가를 내려준다. 


“당신 책은 정말 특이하더군요. 마치 과학소설 같이요.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를 궁금해하죠. 예술가의 일은 절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허망함에 치료약을 주는 거에요. 확신에 차고 생동적이어야 해요. 패배주의자가 되면 안돼요.”


우디 앨런의 영화들을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디 앨런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표현은 사실 그렇게 생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도 더 확고하고 명시적으로 낙관적이라는 점이 인상 깊다. – 또한 ‘과학소설’에 비유한 점 또한 생각할 여지를 주는데, 이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그 의미를 알기 어렵다. 길 펜더가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한 사소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디 앨런이 <슬리퍼>같은 SF 코미디 영화도 만들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냥 지나치기에는 다소 신경이 쓰인다.


한편 길 펜더의 소설을 평가하기 전, 스타인과 펜더가 처음 만났을 때, 스타인은 파블로 피카소가 아드리아나를 그린 그림에 대해 평가하는데, 그때 그녀는 피카소의 그림을 혹평하면서 이런 말도 한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라. (···) 난 파블로에게 이 그림은 아드리아나를 정확히 표현 못했다고 했어요. 이 그림은 보편적이긴 해도, 객관적이지 못해요.”


스타인의 두 발언은 다소 긴장을 안고 있는데, 이는 우디 앨런이 ‘판타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긴장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우디 앨런에게 판타지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한 도피면서도, 현실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스타인’의 말을 통해 앞서 지적했듯이, 작가는 비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판타지를 제공해주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인’은 작가(예술가)가 사물을 객관적으로 그려야만 한다고 혹평하고,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 펜더 역시 판타지는 결국 과거일 뿐이고, 과거사람들은 또 다른 과거를 갈망한다는 것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 이는 다른 영화에서도 줄곧 나오는 것이지만, 가장 비슷한 것이 있다면, <카이로의 붉은 장미>일 것이다.


현실을 지속가능하게 하면서도, 허구적인 판타지의 이중적인 성격과 그 긴장이 있다고 할 때에,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은 판타지를 만들면서도, 그것을 다시 깨고, 그리고 또 다시 마지막 엔딩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 판타지를 재구축한다. 말하자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 펜더가 술을 마시고 파리의 고불고불한 길을 헤매다가 발견한 과거로의 길, 그리고 판타지가 실패한 이후에도 또 다시 판타지를 재기획하는 과정은 마치 감독이 판타지가 가진 복잡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고불고불하고 우회적인 과정을 은유할 것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늘 같은 주제, 주장들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이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술가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에서 등장하는 그 ‘작가론’은 분명 영화의 중추이다. 더불어, 이 영화에서 주를 이루고 있지 않았지만, 판타지의 긴장을 다루는 우디 앨런의 주요한 방법은 물론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