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냥 노트

우리는 왜 이렇게 말해야만 하나: 모 논문에 대한 비판과 자기비판




본 글은 모 논문에 대한 비판적 코멘트이다. 하지만 단지 모 인물의 논문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 우리 혹은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오류를 저지르며 살고 있지 않는지에 대한 자기비판임을 밝히고 싶다. 그러므로 그가 누구인지, 그 논문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아는 사람은 알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사실 그의 주장 자체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 2007년 말 나타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그리고 그 이후 나타난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좌파 경제학자들의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자신의 위기이론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다. 특히 이 작업은 기존의 좌파경제학계 내에 존재하는 위기이론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내에서 위기는 만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순환 내에 존재하는 어느 국면 중에 하나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주기적 공황과, 구조 그 자체의 위기를 구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2008년 금융위기와 위기 이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다소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2008년 위기는 구조위기만이 아니라 순환적 공황이 중첩된 위기였기 때문에, 자본주의 위기의 진단은 양 측면으로 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에 내재된 구조적 위기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위기는 일단 극복되었다. 반면 경기순환상으로는 자본주의는 이미 회복 국면을 넘어가고 있다. 물론 현재 진행 중인 경기순환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보면 상당히 취약한 순환이다. 대금융위기와 국가채무위기라는 심각한 구조위기의 그늘에서 진행되는 순환이 강력하게 전개될 리가 없다. 하지만 2010년을 전후로 미국 자본주의는 회복 국면으로 넘어섰고, 지금은 이미 호황 국면에 진입한 상태다. 유로존은 그 사이 더블딥을 겪었지만, 미약하나마 다시 회복 국면에 있다. 취약한 경기순환이지만 자본주의경제의 회복은 금융위기를 완화, 진정시키는 주요한 일 요인이었다.” (pp.11-12)


정리하자면, 위기는 ‘주기적 산업순환의 한 국면으로서 공황(위기)’와 ‘구조적 위기’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저자가 다른 저자들의 위기이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 두 국면이 중첩적으로 존재했음을 파악하지 못했고, 나아가 주기적 산업순환에 의해 일정정도 회복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적절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가 비판하는 여러 논자들에 대한 평가들이 이후 상술되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할 이유는 없겠다. 다만 그가 다른 논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차별성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는 위기를 ‘이윤율 하락경향’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위기는 순환적 위기이건, 구조적 위기이건 ‘항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는 위기는 순환적 측면과 구조적 측면이 존재하고, 또 이 둘이 서로 연관을 갖고 있기에 그 내적 메커니즘을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이것은 수학적인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실패했다고 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고 보여진다.

 

이와 같은 그의 시각은 다음과 같은 그의 첨언에 압축적으로 나타난다.


“지난 금융위기는 구조위기의 관점에서 보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의 관철과 케인스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이 결합하여 발생한 1970~1980년대의 현대불황에 대한 독점자본의 대응책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세계화와 금융화)이 가져온 직접적 결과다. 마르크스주의 좌파라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마르크스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 왜 스태그플레이션의 위기(케인스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와 금융위기(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라는 형태로 변용, 심화되어 나타나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그 분석은 물론 『자본』에 토대를 두어야 하지만, 독점과 국가개입은 『자본』의 수준으로 환원되지 않는 현대자본주의의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에, 『자본』에 토대를 두면 서도 양자를 매개할 수 있는 단계론, 이 요구되는 것이다. 기타하라 이사무(北原勇)의 주장처럼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일반이론(=『자본』), 독점자본주의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라는 3층 구조의 이론체계하에서 포착되어야 한다.”(pp.13-14)


여기까지가 그의 관점에 대한 요약이다. 그의 주장들에 대해서 보다 정확하게 옮기고자, 다소 길지만,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솔직히 그의 ‘표현’이였다. 특히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취약한 산업순환’이라는 말은 이해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표현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경기순환(business cycle)은 ‘취약’하거나, ‘강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사과나무의 사과가 취약한지, 강건한지를 말하고 있다. 도대체 경기순환이 취약하다는 것은, 변동(fluctuation)이 ‘빈번하다’는 것일까?, 혹은 ‘빈번하지 않다’는 것일까. 아니면 변동폭이 크다는 것일까, 작다는 것일까. 그의 글을 최대한 선의로 읽고 해석하자면, 그는 ‘(경기순환에서) 회복폭이 작다’ 정도의 의미로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왜 그런 표현을 쓰는지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만약 경제의 가령 GDP 변동이 급격히 하락하고서 급격히 상승했다고 해보자. 그럼 그 급격한 상승은 경기순환이 ‘강건’한 것일까? 아니면, 소폭 하락했다가 소폭 상승했다면, 그것은 ‘취약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이 경우 전자의 경제가 취약한 것이고, 후자의 경제가 강건한 것이라고 본다. - 보다 선의로 해석한다고 해도, 그는 경기순환의 등락폭이 작은 것을 두고 (위기 회복에 기여해야할 경기순환이) 약하게 작용하고 있다, 정도의 의미로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도무지 이런 말을 왜 ‘만들어내는지’ 의아하다.


두번째로 그와 다른 논자들 사이의 차별성에 대한 부분이다. 특히 (평소에 그리고 이 논문에서) 그가 집요하게 지적하는, 윤모 교수와의 주장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윤모 교수가 위기의 특정한 시기를 못박는 것에 반해, 그가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는 것을 제외하자면, 나는 양자 사이의 차이를 전혀 찾을 수 없다. 구조적 위기에 대한 그의 견해는 꽤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자들’과는 달리,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현재를 신자유주의이며, 현재의 위기를 신자유주의의 위기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 한편 윤모 교수도 여전히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대체 왜 이 둘의 이론적 차이가 있다고 말해야하는지 납득되지 않는다.[각주:2] [각주:3]


더 나아가 순환적 위기와 구조적 위기 양자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점이 가장 의아한 부분중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구간별 ‘경제사적 논평’을 제시하고서는 그것이 순환적 위기와 구조적 위기 사이에 어떤 내적 연관성이나 메커니즘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다른 논자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경제사적 논평’이 그들의 주장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중요한 주장을 했다고 믿는 것 같으나,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순환적 위기와 구조적 위기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입장’과 미국 경제분석국(bureau of economic analysis)의 경기변동 기록에 대한 ‘인용’뿐이다. 내가 그의 작업을 두고 ‘경제사적 논평’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셋째로 그는 여러 논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근거하고 있는 점은 딱 두개뿐이다. 물론 이 근거는 그 자체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첫번째로 ‘마르크스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적’이기 이전에, ‘실제 데이터’를 확인해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 어떤 시기에 과소소비(말하자면 소비위축)에 의한 위기가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그 위기도 ‘과소소비’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아마 그라면, 그 위기 역시, 과거 존재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이윤율하락경향의 복합적인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실제로 소비가 위축되는 상황’(또는 다른 원인도 많을 것이다. 가장 손쉬운 사례를 든 것이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윤율 하락’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효과’로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데이터’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에 선행하는 입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위기는 순환적 공황국면과 구조적 위기가 중첩되었다는 그의 주장뿐이다. 왜 둘이 중첩되어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뚜렷하지 않다. 왜냐하면 2008년 위기 당시에 경기순환에 있어서도 하락국면이었음은 당연한데, 여기에 그에 따르면 1970-80년대 이래로 구조적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구조적 위기는 회복된적이 없으니, 모든 경기순환상의 하락국면은 양자의 중첩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그에게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그의 논문에 대한 나의 세가지 비판적 코멘트이자, 자기비판이다. 나는 왜 좌파경제학자들이 이런식으로 주장하고 논쟁해야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말하기’에 있어서 아주 근본적인 모순에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이런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장은 써서는 안된다. 한두문장도 아니고 그것이 그의 주요한 주장을 이루고 있다면,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 만약 누군가를 그렇게 설득했다면, 그에게는 다른 어떤 식으로 해도 설득되었을 것이다. 또한 차별성을 과대하게 해석해서도 안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 주장이, 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특별한 증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이 차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논리전개 방법이나, 정치적 입장일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적어도 연구자는 증거없이 주장해서는 안된다. 가정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최대한 합리적이어야 한다. 나는 적어도 연구자의 주장은 이런 식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타당한 합리성을 획득하는 것이 설득의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1. 이를테면 그가 잠시 언급하였던 클라이먼은 신자유주의의 위기임을 부정하고,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라고 주장한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미국정부의 대응을 두고 클라이먼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성격으로 이것은 1930년대 뉴딜정책 이래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그는 현재의 국가적 개입은 금융부문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전의 국가독점자본주의와는 다른 신자유주의적 정책이었다고 평가한다. [본문으로]
  2. 저자가 경기순환의 국면을 그래프로 묘사한 것은 꽤 재미있는 것이었다. 그가 비판하는 상대처럼 특별히 데이터나 근거에 기반하지 않고, 위기 예측에 대한 자의적인 그래프를 하나 그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나아가 그로스만이나 바우어의 논쟁을 근거로 21세기의 경제학적 주장에 대한 비판이나 옹호는 불가능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