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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노트

성적 갈등이 첨예화된 시점에서


흔히 이중적인 성도덕이라고 말한다. 남성의 경우, 전형적으로 이는, "낮에는 순결하면서도, 밤에는 음란한" 여성이라는 성적 판타지로 나타나고, 여성의 경우, 전형적으로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면서도 물질적인 조건을 찾는" 이중적인 면모로 나타난다. 그리고 나는 한국사회가 이러한 이중적인 성도덕이 대단히 만연하고 또 깊숙하게 자리하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성적 적대가 첨예화되고 있는 점이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생각하거나(널리 알려져 있듯이 콜론타이의 주장을 레닌을 ‘물 한잔의 이론’이라고 비꼰 바 있다), 미디어에 의한 현실왜곡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베’의 여성혐오와, ‘여초카페’의 남성적대로 분출되는 우리의 현실은 단순히 현실에의 과장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과장이라면, 이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캐리커쳐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성매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아마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성매매는 우리사회에 대단히 만연하다. 성 상품화의 그 형태와 정도가 상이하게 편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렇게 만연한 것은 당연하게도, 그 수요자와 공급자가 많기 때문이고, 다시 말해서 단순히 남성의 문제 또는 여성의 문제로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질서이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해볼 일이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성매매는 윤락이나 향락의 의미보다도, 위로와 위안의 의미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짧게는 15분 남짓한 쾌락을 위해 남성들이 거액의 돈을 지불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궁극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문제는 일상에서의 연애의 문제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경제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성적 활동이 비시장에서 충족되지 않았기에, 시장에서 찾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주지하듯이 비시장에서의 성적 활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파트너쉽이 동반된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단순히 성적 쾌락을 위한 관계이기 보다는, 상호이해와 신뢰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남성들이 사실은 바로 그 후자의 것이 충족되지 않았기에 시장에서 그것을 얻고자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적어도 시장에서의 성적 충족은 비시장에서의 이해와 신뢰 사이에 강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성별 갈등을 이야기 할 때, 데이트 비용에의 지출 문제를 언급한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실제 연애 관계에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단, 양자 간의 신뢰가 동반된다면 말이다. 사실 진정으로 연애관계에서의 문제는 서로 간의 이해와 신뢰이지 않나. 그러한 문제가 충족될 때, 데이트 비용은 혹은 결혼 비용은 반반씩 내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내든, 전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 문제가 충족되지 않을 때, 비용의 문제는 진정한 문제로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문제가 부차적 문제라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다만 양자 간에 교환되는 것이 '선물'인지, '등가물'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남성이 일방적으로 금전적 지출을 하고, 여성은 성관계를 남성에게 수동적으로 허용하는 관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극단적인 사례는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극단적이기 보다는 '전형적인'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가 만일 문제라면, 그 관계는 연애라기 보다는 돈과 섹스를 교환하는 등가교환의 거래관계이기 때문이고, 만일 이 관계가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 관계가 상호이해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연애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오늘의 문제는 사실 성별 사이에 이 신뢰가 바닥이 나고 성별적인 적대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경제학적으로 표현해보자면, 호혜의 경제가 깨지고, 기회가 된다면 무임승차를 마다하지 않는, 시장경제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중적인 성도덕이 출현하게 되는 동력이 아닌가 싶다. 이중적인 성도덕은 권리에 있어서는 최대로, 의무에 있어서는 최소로 정당화하고 실천하는 행동양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나는 이것이 부분적으로 경제위기와도 유관하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상호 간의 신뢰의 문제다. 다른 말로 한다면, 연대의 문제다. 때문에 나는 성적 적대의 문제를 급진주의 페미니즘 식으로 가부장제 권력관계라거나, 프로이트 식으로 문명 속의 불만과 같은 거창한 개념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한 접근은 내가 느끼기에는 거창하게 다가온다. 오히려 이것은 어쩌면 뒤르케임 식으로 연대의 문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문제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성적 적대를 문제로 올바르게 인식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 적대는 어떤 의미에서, 지속가능한 적대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성별적 연대의식이 얼마나 있는지 회의적이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자신이 가진 적대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습은, 그 만큼 이 연대가 얼마나 조야한 지반 위에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 적대의 모순이 여전히 유지, 재생산되는 것은 이것이 여전히 가능하고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라는, 합리적 기대와 도덕적 정당화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의 그 명백한 정당성은 분명히 연대의 불가능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진정으로 문제라면, 이 성적 적대는 지속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위기의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수행했던 그 이론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그런 의미에서, 연애를 잘 하고 싶다.

덧붙여서.

갑자기 마르크스 경제학식으로 말해보고 싶어졌다. 경제의 호황기에 화폐(데이트비용)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화폐(데이트비용)는 상품(문제)이 아니라 그저 유통수단(데이트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경제의 불황기에 신용(신뢰)가 깨질 때, 화폐(데이트비용)는 진정한 상품(문제)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