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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기억력



얼마 전 밤샘 세미나를 했었다. 세미나를 끝마치고 함께 술을 마시느라 밤을 샌 적은 있어도, 세미나를 밤을 새며 한 건 처음이었는데, 유익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이야기였는데, 사실 나는 ‘운동권’이라는 단어도 알기 전에 ‘마르크스’를 접했다. 운동권이 뭔지도 모를 때, <공산당선언>을 읽고, <자본론>을 읽고, 에리히 프롬이나 마르쿠제, 벤야민을 읽고, 알튀세르와 드보르, 랑시에르, 르페브르 같은 것들을 읽었다. 바디우도 그랬고, 푸코도 그랬고, 벤 파인이나 하비 같은 정치경제학도 읽었다. 인문사회과학서적을 읽기 시작한 것은 스무살 때였다. 처음에는 문화, 예술쪽을 읽다가 베버 같은 사회학서적을 읽었고, 마르틴 부버나 레비나스 같은 철학책도 그 무렵 집적거렸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덕분에 헤겔도 제대로 안 읽어 봤으면서 막스 셀러 같은 것도 읽었고,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을 때 바쿠닌의 <God and the State>같은 것도 읽었다.


확실히 특이한 사례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좀 더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1학년을 마치고 군휴학을 포함한 3년간의 휴학기간 때였다. 첫 다섯학기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할 때였고, 마지막 한학기는 알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로 그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남들처럼 1학년 때, ‘나쁜 선배’를 만나서 동아리에 가입하고 선배들을 따라서 책을 읽어 나갔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가이드도 없이 그냥 혼자 읽어야 했다. 그래서 소위 운동권들이 1학년 때 읽어 내려가는 ‘개론서’는 별로 읽어보지 못했다. 이를테면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장석준의 <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다가 알게 된 D모 조직의 수원지역 활동가였던 모씨를 알게 되었다. 내가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를 읽고 있으니, 그는 당시 나보고 H모 조직과 어울리겠다고 그랬다. 당시에는 그 뜻을 알지 못했었다. 그는 내게 이런 저런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그랬었는데, 결국 그가 그들을 소개해주기 전에 이미 그 사람들을 내가 먼저 다 알게 되었다. 혼자 ‘빨간 책’들을 읽고 앉아 있다보니, 답답해서 사실 내가 먼저 자발적으로 ‘빨간’ 사람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대학시절을 이런 저런 활동을 하면서 보냈었다. 이런저런 시위현장, 농성현장, ‘문화제’라고 이름붙인 집회들, 노조사람들도 만나고, 수업시간에 대자보를 쓰고 그런.


요새도 가끔 민중가요를 듣는다. 사실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날 때가 있다. 대학생시절, 대학원시절, 그리고 지금, 모두 각각 환경이 너무 다르다. 사실 옛날 생각이 지금 보다 더 생생하게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기억력이 너무 나쁘다. 올해 비정규직노동자대회는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