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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이윤율과 실증연구에 관한 메모

다음의 글은 모 인물의 블로그 포스팅을 읽고 개인적인 생각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본 것으로, 사실 약 2주 전쯤 쓴 것이다. 아마 그는 내가 이런 코멘터리를 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할 것인데, 아직 개인적으로 공부도 부족하고, 스스로 충분히 정리된 생각도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알리지는 않았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와 특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단순히 개인적인 정리를 목적으로 썼던 글이었기 때문에 다소 비판적으로 끄적거려보았다. 


* * * * *



C씨는 마르크스경제학의 계량경제학적 접근에 대해서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는 이러한 접근법 자체에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실증적 접근이 마르크스경제학의 주요한 요소들과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계량경제학은 ‘현상으로써 현상을 설명하는’ 관계식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현실에서 관측된 데이터들을 가지고 변수들 사이의 설명력을 따져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 자체가 애초에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행했던 방법론과 다르다. 그의 방법은 현상들 속에서 실체(내용, 본질)을 발견하고, 실체가 어떻게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이론적으로 밝히는 방식이다. 이 실체라는 것은 결코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으며, 그것이 어떤 현상들로 나타나기까지는 다양한 단계의 변형과정과 교란작용을 거칠 수 밖에 없다. ··· 계량경제학이 땅 위의 사물들 사이에 수평의 화살표를 긋는 작업이라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땅 아래에 묻혀 보이지 않는 실체들(구조)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땅 위의 현실로 수직의 화살표를 그어 올리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판단에 이러한 서술은 여타의 과학이나 예컨대 ‘주류’경제학과는 다른 마르크스경제학의 종별적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과학 일반에 관한 일반론적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모든 과학은 현상 그대로를 본질로 해석하지 않는다. 예컨대 계량경제학은 다양한 거시경제변수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인과성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된 인과는 현상(예컨대 상관관계)과 상이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계량경제학은 반사실적 추론에 해당한다.


그는 이윤율에 관한 예를 드는데, 인용하자면 이렇다.


“예컨대 마르크스경제학의 계량분석에서 ‘설명변수’로 주로 등장하는 것이 이윤율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순수하게 관측되고 측정될 수 없는 심층의 실체다. 이를 계량분석의 틀에 맞추려면 어쨌든 현상된 지표들 중에서 설명변수를 대신할, 말하자면 Proxy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현실의 데이터 속에서 구성된 이윤율은 사실 엄밀히 말해 ‘시장이윤율’이다. 시장이윤율은 정작 마르크스가 종속변수로 놓았던 현상의 하나이다. 마르크스경제학이 통계/계량 도구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방법론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처음부터 현상을 기술(description)하는 용도로만 쓰거나(예: 시장이윤율 궤적의 통계적 특성을 파악), 실체에 근접한 설명변수를 가공할 수 있는 방법을 정립하거나(예: 시장이윤율 등의 자료에서 순수한 가치이윤율을 도출해내는 방법을 고안). 어찌됐든, 주류경제학이 전제하는 ‘실증’ 개념에 맞춰진 계량경제학의 틀 안에서 마르크스경제학을 끼워넣어서 어떤 유의성을 찾는다고 해서 그게 정말 유의한 것일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물론 그의 설명자체는 일면 타당하다. 특히 가치라는 영역은 그가 상술한 현상형태에서 직접 파악할 수 없는 본질에 해당하고, 주류경제학은 이를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는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첫째로, 마르크스가 시장이윤율을 종속변수로 취급했던 것인지는 따져볼 일이다(Ⅰ. r*은 종속변수인가?). 여기서 그는 시장이윤율이 종속변수이고, 가치이윤율은 설명변수라고 지적하지만, 이러한 단언은 사실 어색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종속변수이건 설명변수이건, ‘무엇에 대한’ 종속변수 혹은 설명변수인지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본의 구성비(가변자본/불변자본)’라는 거시경제변수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는 가치단위로도 가격단위로도 나타낼 수 있다. 그렇다면 가치단위의 이윤율, 그리고 가격단위의 이윤율과 ‘자본의 구성비’는 어떤 인과적 관계를 가지는지 물어보자. 즉, 가치단위의 이윤율이 가치단위의 자본구성비에 영향을 준다거나, 가격단위의 이윤율이 가격단위의 자본구성비에 영향을 준다는 설명은 직관적으로 명료하지만, 가치단위의 이윤율이 가격단위의 자본구성비(즉, 설명변수로서 가치이윤율)에, 혹은 가치단위의 자본구성비가 가격단위의 이윤율(즉, 종속변수로서 시장이윤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그리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여기에 다시 두가지 논점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두가지 논점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다.


가치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가치가 실재하는지에 대해서 묻고, 그리고 그것을 실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물론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본 글에서 다룰 것은 아니다). 가치에 대한 물음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는 자명한 것이었으나, 오늘날 주류경제학에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가치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이단적이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는 가치수준과 가격수준을 구분하며 양자간의 추상수준을 달리 보았다. 그리고 가치실체론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흔히 가치수준에서의 운동이 종국적으로 가격수준에서의 운동을 규제/결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추상수준의 차이를 단번에 인과적 관계로 환원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ⅰ. r → r*의 인과적 해석은 가능한가?). 이는 의심할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적어도 자명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복잡노동의 가치는 단순노동의 가치 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복잡노동의 가치는 가격수준에서의 높은 가격에 의거해서 우리는 ‘복잡하다’라고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말하자면, 가치의 ‘가치’가 가격에 의해 내생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의심을 근거없이 기각할 수는 없다. 예컨대, 톨스타인 베블런은 주류경제학에서 개인의 ‘선호’(미시적 수준)가 사실, 제도나 사회(거시적 수준)에 의해 ‘내생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추상수준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인식적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지, 어떤 추상수준이 다른 어떤 추상수준을 규제하거나 결정한다는 인과적 추론을 그 자체로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가치가 가격을 규제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그렇게 수행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둘째로, 추상수준의 차이가 곧 인과적 관계라는 전제를 두더라도, 이를 어떤 방식으로 보증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ⅱ. r → r*을 인과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어떤 추정전략이 필요한가?). 인과론에 관한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를 염두해 볼 때, 인간의 이해력에 있어서 순수하게 경험에 근거한 인과적 추론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인과적 추론이라는 것 그 자체가 (과학적) 설득을 위한 하나의 전략적 행위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략적 행위는 사실 학문 간 상당히 다양한 접근법이 존재하고 있으며, 동일 분과학문 내에서도 다양한 방식이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계량경제학에서 코울즈 커미션의 접근법과 그랜저-인과성, 그리고 실험경제학의 통제/실험은 모두 다른 전략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단순히 OLS를 사용할 것인지, MLE를 사용할 것인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 인과적 추론을 그 특유의 서술방식으로 대체하였고, 우리는 이 방법이 여전히 적절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이는 가치를 그 자체로 실증할 수 있는지 혹은 가치는 착취를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위한 필수적 가정일 뿐인 것인지, 아니면 총가치를 총가격으로 일치시켜야 하는지 등의 모든 논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물음으로 들릴 수 있으나, 이는 ‘가치를 실증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이론적 논의를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초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먼저 시장이윤율이 정말로 종속변수인지 묻고, 여기서 다시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로, 추상수준의 차이를 곧 인과적 관계로 해석할 수 있는지 묻고, 둘째로 인과적 해석이 가능하다면, 그 추론전략에서 마르크스의 서술방법이 여전히 적절한 것인지 물었다. 물론 여기 물음에서 그 해답을 제시한 것은 아니나, 그 물음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를 간략히 지적하고서 글을 마치도록 하자(Ⅱ. r*은 설명변수인가?). 첫번째 물음이 해소된다면, 시장이윤율은 가치이윤율에 종속되는 종속변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장이윤율의 운동이 단순히 오늘날 가치이윤율의 동학을 간접적으로, 내지는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대리변수라는 표현보다는 지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반영’일지라도, 시장이윤율의 동학 그 자체가 주는 거시경제적 효과를 생각할 수 있다. 시장경제의 (근본적) 운동은 모두 가치수준에서 발생하고, 시장이윤율은 그저 그 반영일 뿐이라고 사고하지 않는다면, 시장가격이윤율은 분명 시장가격수준에서 다른 어떤 변수들과 상호작용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앞서 지적했듯이, 가치수준에서의 운동과 가격수준에서의 운동 간의 관계는 자명하지 않지만, 동일한 수준 내에서의 운동을 사고하는 것은 보다 명료하다. 그리고 가격단위에서 이윤율은 가치단위의 이윤율의 종속변수일 수 있으나, 가격단위의 다른 거시경제변수에는 설명변수일 수 있다. 그리고 실증연구들의 대부분에서 사용되는 변수들은 모두 가격단위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윤율을 단순히 ‘종속변수’로서 가치수준의 운동을 나타내는 하나의 ‘반영’으로만 바라볼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