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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우디 앨런의 영화에 관한 노트: 50편의 영화를 모두 본 것을 자축하며


우디 앨런의 영화에 관한 노트

50편의 영화를 모두 본 것을 자축하며





“Doc, my brother's crazy. He thinks he's a chicken.” And the doctor says, “Well, why don't you turn him in?” And the guy says, “I would, but I need the eggs.”

Well, I guess that's pretty much now how I feel about relationships. You know, they're totally irrational and crazy, and absurd and ···. But I guess we keep going through it because most of us need the eggs. – Annie Hall(1977)


이 글은 8월 초에 쓰기 시작하였다. 50편의 그의 영화를 다 본 것은 지난 8월 5일이었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한동안 이어 쓰지 않고 있다가 이제서야 글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50편의 영화를 모두 다 보는데 까지 약 4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50편을 모두 다 보고 우디 앨런에 대한 나의 애정은 50편을 다 보면서 어떤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 같다. 50편의 영화를 모두 다 보게 된 것을 스스로 자축하며, 이 글을 썼다. 글은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내용은 사실 유기적으로 큰 관련은 없으나, 하나의 글처럼 묶었다. 


1. 들어가며: ‘우디 앨런 50+’


이 글은 우디 앨런의 영화 50편을 모두 다 본 것을 자축하고자 쓰는 글이다.[각주:1] 때문에 이미 많은 내용이 다른 여러가지 글에서 언급한 것들이다. 하지만, 50편을 모두 다 본 기념으로 글을 하나쯤 쓰고 싶었다. 50편의 영화에는 그의 데뷔작인 <타이거 릴리>, 그리고 두 편의 단편 영화, <멘 오브 크라이시스>와 <사운드 프롬 어 타운 아이 러브>, 그리고 텔레비전 상영작인 <돈 드링크 더 워터>가 포함되어 있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이, <타이거 릴리>는 그의 데뷔 영화로 일본영화를 편집과 더빙을 다시 하여 완성한 영화이다. 때문에 우디 앨런의 데뷔영화로 <돈을 갖고 튀어라>를 말하기도 한다. <돈 드링크 더 워터>는 원래 그가 시나리오를 써서 상영한 연극으로 1966년작이다. 이 연극을 1969년 영화화되는데, 우디 앨런이 직접 감독을 맡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는 1994년에 다시 영화화되는데, 이 때는 우디 앨런이 직접 감독으로 연출을 하고 배우로 연기도 한다. 극장 상영작은 아니고 텔레비전 상영작이라고 한다. 내가 본 영화는 바로 1994년작 이 영화이다. 그리고 사실 언급한 네 편의 영화 중, <돈 드링크 더 워터>를 제외한 세 편의 영화는 자막을 구할 수 없어서, 영문자막으로 봐야만 했다. 덕분에 이 세편의 영화는 잘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를 해도 재미있게 볼 수는 없었다. 지루해서 꽤 졸았다.


그림 1 Google Ngram에서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 <애니홀>의 빈도 추이


그밖에 50편에 포함되지 않은 영화들도 있다. 우디 앨런이 각본만 썼거나, 배우로만 출연한 영화들이다. 우디 앨런이 각본을 쓴 영화는 총 53편으로, 3편 더 많다. 즉, 각본만 쓰고 감독으로 임하지 않은 영화가 3편이 있다. 나는 이중에 2편을 보았는데,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원제: Play It Again, Sam)>과 <고양이(원제: What's New Pussycat?)>이다. ‘푸시캣’은 <타이거 릴리> 이전 작품으로, 우디 앨런이 각본을 쓰고 배우로도 출연한다. 우디 앨런은 이 영화에서 자기가 감독을 하지 못해서 영화가 엉망으로 연출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이후 영화들에서 우디 앨런은 각본과 연출 모두를 혼자 맡는다.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은 그의 브로드웨이 연극인데, 이후 그의 각본을 토대로 영화화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편은 앞서 언급한 <돈 드링크 더 워터>으로, 1969년 그의 연극이 영화화되면서 그가 각본만 쓰고 감독을 맡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아직 구하지 못해서 보지 못했다.


그 밖에도 우디 앨런은 배우로서 출연한 영화들이 많다. 우디 앨런이 배우로 출연한 영화는 총 59편으로, 그가 배우로 출연했거나, 각본을 썼거나, 연출을 한 영화는 총 79편이다. 감독이나 각본을 맡지 않고서 배우로만 출연한 영화가 대략 30편 가량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배우로만 출연한 영화는 별로 보지 못했다. 딱 두 편을 보았는데, 하나는 <개미>이고, 다른 하나는 <지골로 인 뉴욕>이다. 두 편 다 재미있게 볼 수 있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저 배우로만 출연했을 뿐이지만, 이 두 영화 모두 감독으로서 우디 앨런의 취향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특히 나는 <개미>가 인상 깊었는데, 애니메이션이므로 목소리 연기만 맡았을 뿐인데도 애니메이션의 많은 부분에서 그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사나 연출, 소재, 배경음악, 상대역 캐스팅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그의 평소 취향이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그가 배우로만 출연한 영화들 마저도 모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2. 내가 좋아하는 우디 앨런의 영화들


50편의 영화 중에서, 도대체 몇 편을 골라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사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모두 다 재미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우디 앨런의 영화 중 재미있는 영화는 최소 과반이다. 과반을 훨씬 넘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중에서 어떻게 더 추려내야 할 것일까. 물론 정말 손에 꼽는 영화만 몇 개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애니홀>이나 <맨하탄> 같은 아주 유명한 작품 몇개를 고를 것이다. 그러나 우디 앨런의 영화를 그렇게 몇몇 대작들로 추려낸다는 것은 몹시 아쉽다. 10개까지 추려보려고 했지만 10개 안으로는 추려낼 수 없었고, 결국 나는 시대순으로 그의 영화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시기 구분은 다분히 작위적인 구분일 뿐이다.


A. <애니홀> 이전 시기: 1966-1975


나는 물론 처음 우디 앨런에 빠지게 된 것은 <애니홀>을 보면서부터 였다. 그런데 <애니홀> 이전의 우디 앨런의 영화는 B급 코미디 영화였다는 점이다. <애니홀>의 세련된 연출(우디 앨런은 사실 그의 인터뷰집에서 <애니홀>은 ‘중산층적’이라면서 별로 탐탁치 않아 한다)에 매료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실 나는 <애니홀> 이전의 B급 코미디 영화들을 내가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처음 그의 B급 코미디를 봤을 때는 아주 당혹스러웠다.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보았었는데, 아직 그의 B급 영화 감성에 빠져들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재미있게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그에게 빠져들었을 때에 그의 B급 영화들은 아주 재미있었고, 심지어 낭만적이었다. 사실 나는 <슬리퍼>를 보고서 너무 재미있어 하는 나를 깨닫고, 내가 정말 우디 앨런의 팬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추천작은 그의 또 하나의 데뷔작인 <돈을 갖고 튀어라>, 그리고 <슬리퍼>와 <사랑과 죽음>이다. <바나나 공화국>도 꽤 재미있었는데, 유사한 영화인 <슬리퍼>나 <사랑과 죽음>에 비하면 별로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세계관은 이미 그의 데뷔작인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이미 모두 나타난다는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애니홀>에서 아주 세련되게 연출되었던 여러 장면들이 이미 <슬리퍼>나 <사랑과 죽음> 등 이 시기 작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때문에 <애니홀>을 보고서 이 시기의 영화들을 연달아 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다.


예컨대, <사랑과 죽음>에서 우디 앨런이 다이앤 키튼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이 서로를 바로 앞에 두고서도 정면을 보면서 서로 혼잣말을 하는데, 이는 마치 <애니홀>에서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이 섹스를 하면서 영혼이 빠져나와서 관객에게 말을 거는 장면과 유사하다. 또는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 우디 앨런이 여주인공에게 첫눈에 반하고 둘이 서로 산책하는 장면은 <맨하탄>이나 다른 그의 영화에서 늘 나오는 낭만적인 산책 장면을 연상케 한다.


B. <애니홀>에서 <또 다른 여인>까지: 1977-1988


이 시기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우디 앨런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물론 그 시작은 당연히 1977년작 <애니홀>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애니홀> 이후로 우디 앨런은 엄청난 성공을 거머쥔다. 1978년 제 50주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디 앨런의 <애니홀>은 모두가 <스타워즈>가 휩쓸 것이라는 기대를 깨고, 5개 영역의 후보에 오르고,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음악상, 총 4개 영역에서 수상하게 된다. 그러고도 우디 앨런은 재즈클럽에서 연주를 해야하는 날이라는 이유로 시상식에 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시기 작품들 중, <애니홀>에 대등하게 내가 좋아하는 영화로는 1979년 <맨하탄>, 1983년 <젤리그>, 1985년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6년 <한나와 그 자매들>, 마지막으로 1987년 <9월>이 있다.


이중에서 <애니홀>과 <맨하탄>, 그리고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전통적으로 나에게 우디 앨런 ‘베스트’에 들어가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중에서도 당연 <애니홀>이 가장 좋았는데, 요즘에는 점점 <맨하탄>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있다. 그러나 우디 앨런의 인터뷰집을 살펴보면, 우디 앨런은 이 시기 영화들을 ‘중산층적’이라고 표현하며 탐탁치 않아하는 반면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는 <사랑과 죽음>을 꼽는다. 이 ‘베스트’에 나중에 끼어들어간 영화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젤리그>와 <9월>, 그리고 후술할 2013년작 <블루 재즈민>이다. 특히 <젤리그>는 <애니홀>과 함께  (우디 앨런의 영화 중) 내가 유일하게 10점 만점을 준 영화이다. 


<9월>의 경우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최근에서야 볼 수 있었는데, 아주 놀랄 만큼 재미있었다. 우디 앨런은 코미디 영화 말고도 지속적으로 진지한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많이 찍어왔는데, 대표적인 영화가 이 시기에서는 <인테리어>나 <스타더스트 메모리스> 등이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우디 앨런의 진지한 영화 시도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재미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하지만 <9월>은 내가 처음으로 우디 앨런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영화이다. 무척 재미있었다.


C. <범죄와 비행>에서 <애니싱 엘스>까지: 1989-2003


이 시기의 작품들도 앞선 시기만큼이나 재미있게 본 영화들이 많다. 물론 <부부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부부일기>는 꽤나 <한나와 그 자매들>과 유사한 느낌이기 때문에 앞선 시기의 영화 목록에 포함 되었어야 했으나, 시기상 <범죄와 비행>에서 시기 구분을 하고 싶었기에 부득이하게 <한나와 그 자매들>과는 따로 묶이게 되었다. <부부일기>는 한편으로 우디 앨런이 순이 프레빈과 스캔들이 있던 시기의 영화라는 점도 놀라운 지점이다. 이 영화에서 우디 앨런과 미아 패로우는 부부사이로 나온다.


<범죄와 비행>은 개인적으로 우디 앨런의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영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세계관에 관한 상당히 솔직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비참한 세계는 그대로 묘사되고, 그 와중에 미아 패로우와 ‘Singing in the rain’을 보는 장면은 아름답게 연출된다. <맨하탄 살인사건>은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가운데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 간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 아주 볼만하다. 이 과정에서 ‘삶과 예술은 구분되지 않는다’는 우디 앨런의 대사가 아주 재미있다. 그밖에도 <제이드 스콜피온의 저주>, <애니씽 엘스>, <헐리우드 엔딩>도 상당히 재미있게 본 영화들이다. 그밖에 우디 앨런이 출연하지 않는 영화들 중에서 <셀러브리티>와 <스윗 앤 로다운>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특히 <스윗 앤 로다운>에서 숀 펜과 사만다 모튼 두 주인공 모두 아주 보기 좋았다. 물론 이 영화에서 우디 앨런이 아에 출연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중간중간 인터뷰어로 잠깐씩 등장할 뿐이다.


D. <멜린다 앤 멜린다>에서 <카페 소사이어티>까지: 2004-2016


사실 이 시기에서부터는 우디 앨런이 출연하는 영화가 드물다. 그리고 재미있게 본 영화도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도 네 편의 영화를 꼽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바로 <미드나잇 인 파리>, <블루 재즈민>,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카페 소사이어티>이다. 물론 <미드나잇 인 파리>가 우디 앨러느이 영화 중에서 가장 성공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여기서 가장 압권은 <블루 재즈민>이다. 개인적으로 <블루 재즈민>은 우디 앨런의 ‘베스트’에 들어갈 만큼 좋다. 여기서 우디앨런의 비관적 세계관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인간에 관한 혐오감 마저도 든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와 <카페 소사이어티>도 꽤 재미있고, 영상도 상당히 예쁘다. 특히 <매직 인 더 문라이트>에서 엠마 스톤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과학과 마술에 관한 은유도 늘 나오던 것이지만, 재미있다.



3. 우디 앨런의 방법에 관하여


아마 뉴욕도 대도시의 교통체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통체증에 대한 우디 앨런의 언급은 특별히 없지만, <애니홀(1977)>의 수미일관식 구성은 대도시 뉴욕의 교통체증을 연상케 한다. 범퍼카로 시작해서, 주차장에서의 연쇄추돌사고로 끝맺는 그 장면 말이다. 사실 이 은유는 그가 영화에서 자주 묘사하는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제에 직면’했다는 표현은 사실 그의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 표현의 영어 원문까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이 표현은 그의 인터뷰집, 우디 앨런·로버트 E. 카프시스, 『우디앨런: 뉴요커의 페이소스』, 마음산책, 2008(이하 인터뷰집)에서 원용한 것이다. 여기서 우디 앨런은 영화 <인테리어(1978)>의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문제에 직면한’ 사람에 대해서 묘사한다. <인테리어>는 우디 앨런이 처음으로 도전했던 ‘진지한’ 영화로, 그가 영향을 많이 받았던 잉마르 베리만의 비관주의를 강하게 투영시킨 작품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부모님의 갑작스런 이혼 이후, 서서히 무너져가는 가족과 세 딸들의 삶에 대해 다루는데, 특히 여기서 조이 역을 맡았던 메리 베스 허트에 대해서 우디 앨런은 ‘문제에 직면’했다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언니였던 다이앤 키튼(레나타 역)과는 달리, 특별한 재능을 가지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저런 일들에 도전해보지만 두각을 보이지 못했고, 더구나 날로 심각해져가는 어머니는 오로지 홀로 부양하며 생활해야 했다.


물론 이 영화에서 다른 딸들이나 그녀들의 남편 등 모두 저마다 어떤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레나타는 그의 남편과의 갈등, 그리고 그 남편은 잘 풀리지 않던 그의 소설쓰기, 하루아침에 애정했던 남편을 잃어야 했던 머린 스태플턴(펄 역) 등, 저 마다의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인테리어>의 가장 마지막 장면이자, 포스터로 쓰였던 장면으로, 세 딸들이 창가를 바라보는 장면은 각자의 갈등을 앉고 있는 세 딸들이 어색하게 하나의 화면에 가득 차 있는데, 우디 앨런은 그의 인터뷰집에서 이를 ‘숨이 막힌다’고 표현한다. 대도시 뉴욕은 말하자면, 그러한 문제들이 ‘집적된’ 공간이고, 그의 영화들은 사실 이 문제에 관한 그의 ‘방법’을 은유한다.


<애니홀>은 수미일관적인 구성을 지녔는데, 언급했던 교통체증에 대한 은유 말고도, 영화의 처음과 끝에 우디 앨런이 독백으로 한가지 농담을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도입부에 나오는 농담은 한 리조트의 두 할머니 간의 대화이다. 그들이 말하길 “레스토랑의 음식이 맛도 없는데, 양도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디 앨런은 ‘삶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외롭고 비참하며’, ‘고통스럽고 불행하다’. 그의 비관주의적 세계관은 영화의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다. <애니홀>에서 우디 앨런(앨비 싱어 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영화에서도 많다.


가장 명료하게 묘사되는 영화는 <범죄와 비행(1989)>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옵니버스 식의 두 서사가 마지막 엔딩에 가서 하나로 합쳐지는데, 한 서사는 아내를 두고서 불륜을 하다가 내연녀와의 갈등으로 그녀를 살해하고 전전긍긍하는 어느 저명한 의사의 이야기를, 다른 서사에서는 아내를 두고서 다른 여자를 짝사랑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이 혐오하는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게 되어 낙담하는 어느 다큐멘터리 감독의 이야기를 다룬다. 물론 이 다큐멘터리 감독이 바로 우디 앨런이다. 이 두 주인공은 어느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 의사는 좋은 시나리오를 준다며, 허구인 척 자신의 살인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범죄가 들통날 것 같아서 전전긍긍하지만, 범죄가 걸리는 것은 결국 운에 달린 것이고, 살인자는 처음에는 전전긍긍했지만, 수사는 증거가 없어 곧 중단되고, 그 이후로 아주 행복하다고 말이다. 그렇다, 사실 우디 앨런의 비관주의적 세계관에 따르면 권선징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운에 달린 것이다.


그의 비관주의적 세계관의 극단은 개인적으로는 <블루 재스민(2013)>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특히 케이트 블란쳇(재스민 역)의 역할은 그 핵심인데, 부유하던 과거를 잊지 못하고 살며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오자 거짓말을 하며 다시 낭만에 심취해 있는 모습은 인간에 관한 혐오감 마저도 불러 일으킨다. 인간의 속물성에 극단까지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물성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은 <애니홀>에서부터 꾸준히 등장했던 것이기는 하다. 뉴욕은 말하자면 이런 끔찍한 풍경의 온상인데, 그는 유독 이 뉴욕의 풍경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말하자면 비참과 낭만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공간인데, 이 모순적인 형용은 사실 ‘문제에 직면한’ 삶, 말하자면 비참한 삶에서 그의 대응방법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 


뉴욕에 대한 묘사는 물론 <맨하탄(1979)>의 도입부에 우디 앨런의 독백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이때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재즈곡도 아주 인상적인데, 음흉하고 음침하게 시작되어서는 금방 낭만적인 선율로 바뀐다. 그는 ‘뉴욕시를 흠모’한다. 뉴욕시는 계절이 바뀌지 않은 것도 같고,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그러나 생각없이 낭만적이기도 하고, 부패와 마약에 찌들기도 하며, 개인성이 결핍되기도 하고, 그러나 어쨌든 너무나 낭만적인 공간이다. 사실 이 도입부는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의 도입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도 뉴욕시의 여러 풍경과 함께 뉴욕시에 관한 한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도입부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영화 시나리오도 닮았다. 독백의 주인공은 한 회사원으로 그는 거절을 못하는 성격 탓에 회사 상사들에게 늘 열쇠를 빌려주는데, 그들이 열쇠를 빌리는 이유는 내연녀와의 은밀한 장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대가로 회사에서 날로 승진해가는데,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그는 우연히 자신이 짝사랑하는 회사의 여직원이 회사 사장의 내연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그 여직원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사장과 함께 그의 집을 들락거린다. 물론 그녀와 남자 주인공의 사랑은 영화의 엔딩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새드 엔딩이 흔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해피 엔딩도 꽤 많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엔딩은 다르지만 가장 비슷한 영화라면, 아마 <카페 소사이어티(2016)>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디 앨런이 뉴욕을 선택했는 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의 후기작으로 갈수록 뉴욕에서 파리나 로마와 같은 유럽으로 넘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디 앨런에게서 뉴욕을 빼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애니홀>이나 <맨하탄>은 물론이고, <한나와 그 자매들(1986)>, <범죄와 비행>, <부부일기(1992)>, <맨하탄 살인사건(1993)>,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 등 그의 작품 대부분은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 로브 라이너의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1989)>도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글렌 고든 카론의 <러브 어페어(1994)>, 카메론 크로우의 <제리 맥과이어(1996)>, 제임스 L. 브룩스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 마지막으로 노라 에프론의 <유브 갓 메일(1998)>도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여기에 대표적인 스크류볼 코미디 작품인 하워드 혹스의 <아이양육(1938)>과 프랑크 카프라, <어느날 밤에 생긴 일(1934)>은 뉴욕으로 가는 길, 코네티컷에서의 일을 다룬다.


뉴욕은 낭만적인 도시라는 것은 꽤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사랑은 언제나 문제적이다. 불륜은 사실 그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언제나 사랑을 하는데, 때로는 불륜을 하며 로맨스를 꿈꾸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이별을 통보하고 후회하기도 하며, 연인과 싸우고 다른 사람에게 호감이 갔지만 이내 다시 자신의 연인에게 돌아가기도 한다. 사랑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데,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하고, 그의 영화는 온통 사랑이야기들이다. 사실 ‘문제에 직면한 사람’은 그의 영화에서 다양하게 묘사되는데, 예컨대 <애니홀>에서는 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인 것이다. <애니홀>에서 우디 앨런이 하는 마지막 농담은 사랑에 관한 그의 생각을 잘 묘사한다.


“Doc, my brother's crazy. He thinks he's a chicken.” And the doctor says, “Well, why don't you turn him in?” And the guy says, “I would, but I need the eggs.”

Well, I guess that's pretty much now how I feel about relationships. You know, they're totally irrational and crazy, and absurd and ···. But I guess we keep going through it because most of us need the eggs. – Annie Hall(1977)



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사랑을 하지만, 사실 그것이 일종의 판타지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면 사랑은 믿을 수가 없다. <슬리퍼(1973)>를 보면, 그의 회의주의적인 세계관을 잘 드러내는 대사가 나온다. 다이앤 키튼과 그의 대화로, 영화의 엔딩에 등장하는데, 다이앤 키튼이 그에게 묻는다. “알겠어요 당신은 과학을 안 믿는 군요. 정치구조도 안 믿고, 신도 안 믿죠? 그럼 도대체 뭘 믿는 거죠?”  여기에 대한 우디 앨런의 답은 이렇다. “섹스와 죽음! 내 평생 한번쯤은 겪게 되는 일이죠.” <부부일기>를 보면 좀 더 흥미로운 대사가 등장한다. 대학교 교수인 우디 앨런은 자신의 제자 라이셋 안토니에게 호감을 갖는데, 그의 소설을 읽은 라이셋 안토니는 우디 앨런에게 ‘왜 불륜을 미화하는’ 소설을 쓰냐고 따지듯이 묻는다. 여기에 우디 앨런은 특유의 말투로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과장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장면의 연출은 아주 인상적인데, 차창으로 라이셋 안토니의 얼굴에 햇빛이 비추고, 생기 발랄하면서도 쏘아붙이듯이 우디 앨런에게 묻고, 우디 앨런은 특유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을 한다. <맨하탄>의 엔딩에서 우디 앨런과 마리엘 헤밍웨이(트레이시 역)의 대화를 연상하게 한다.


좌우간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그가 과장하기는 했지만, 그에 따르면 사랑은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몹쓸 것이고, 믿을 수도 없는데, 역설적이게도 우디 앨런은 사랑에 대해서 만큼은 아주 낭만적으로 연출한다는 점이다. <맨하탄>에서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이 비를 피해서 박물관에 들어가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아주 낭만적이다. 물론 이 장면은 <맨하탄> 이후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클리셰 중에 하나인데, <매직 인 더 문라이트(2014)>에서도 아주 인상적이다. 다소 다르지만 비와 연관 짓는 것 중에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엔딩도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인과의 낭만적인 산책 장면은 사실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돈을 갖고 튀어라(1969)>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연출장면이다. 여기서 우디 앨런은 도둑질을 하려고 접근한 여성에 첫눈에 반해서 그와 산책을 한다. 자신이 클래식 교향악단의 연주자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다. <애니홀> 이전의 촌스러운 연출이지만 이 장면도 개인적으로 아주 낭만적이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그의 시각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역시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이다. 그의 영화 중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상당히 드문) 영화라는 점도 특이점인데, 이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함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세실리아 역을 맡은 미아 패로우이다. 대공황기에 남편은 실직을 하고 바람을 피우며 술과 도박을 일삼고 그녀를 때리기까지 한다. 그녀는 홀로 온갖 구박을 들으며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하는데,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홀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본 어느 날,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제프 다니엘스(톰 백스터 역)이 스크린에서 자신에게 말을 건낸다. ‘저기요, 이 영화 또 보시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서 그는 스크린에서 뛰어나와서,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데이트를 즐긴다. 사랑에 관한 이처럼 극적인 판타지는 또 없을 것이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결말은 새드 엔딩이지만, 사랑에 관한 그의 연출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로, 줄곧 말해왔던 것처럼 사랑은 ‘판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허구라는 것이다. 하지만 또 동시에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마치 유령이 허구이지만, 실재하기 때문에 작동하는 것처럼, 사랑은 판타지이고 또한 실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낭만적 사랑이 실재하는 장소는 바로 허구와 현실의 경계선이다. <제이드 스콜피온의 저주(2001)>를 보면,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대사가 등장한다. ‘누구나 그런 느낌을 주는 상대를 찾아야 해요. 당신이 이 황홀한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게 안타깝네요. 딱 한번만, 추악한 현실의 커튼이 올라가기 전에 ···’, 우디 앨런은 이 대사와 함께 최면에 걸린 그녀와 키스를 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마법(최면)’과 ‘거짓말’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사실 과학이 아니라 주술이나 미신, 마법 등에 힘을 빌리는 것은 그의 영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슬리퍼>에서 우디 앨런이 ‘과학을 믿지 않는’ 것으로 나온 이후로, 후기로 갈수록 단순한 불신이나 회의주의에서 마법이나 주술을 추구하는 것으로 점차 표현이 강화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맥락은 일관적이다.


그리고 ‘영화’는 말하자면 낭만적 사랑이 실재할 수 있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선과 같은 곳이다. 때문에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다니엘스는 스크린 밖으로 뛰어 나온 것이고, <애니홀>에서 우디 앨런은 때때로 청중에게 말을 건네고, 실제 마샬 맥루한이 나와서 한 남자를 비난하고, <젤리그(1983)>에서 수잔 손택이 나와서 ‘나는 해석에 반대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구이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는 영화 자체가 온통 ‘영화’에 대한 것들이었지만, 다른 영화들에서도 ‘영화’는 빼놓을 수 없는 소재이다. 다소 코미디적 요소로 쓰였지만 <애니홀>에서도 영화는 중요한 소재로 나오는데, 대개 그의 영화에서 영화는 낭만적인 소재이다. <맨하탄>에서는 우디 앨런과 마리엘 헤밍웨이가 함께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을 아주 낭만적으로 그리고, <범죄와 비행>에서는 우디 앨런과 미아 패로우가 함께 ‘Singing in the Rain’을 보는 장면이 아주 낭만적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맨하탄 살인사건>을 보면 흥미로운 대사가 스쳐지나 간다. 다이앤 키튼과 살인사건에 대해서 파헤치면서 우디 앨런이 이런 말을 흘린다. ‘다시는 인생과 예술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을거야’. 


내 생각에 우디 앨런에게 있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선 속, 예컨대 영화 속에서 실재하는 이러한 낭만적 사랑은 비참함 속에서도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고유한 방법으로 보인다. 그가 비록 <애니홀>의 마지막 농담에서 이러한 낭만적 사랑을 ‘전적으로 비이성적이자 광기어린 것’이라고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동시에 ‘인생과 예술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사랑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방법에 관해서 한가지 언급해야 할 것이 남아있다. 바로 그가 판타지를 전적으로 긍정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애니홀>에서 우디 앨런의 구애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범죄와 비행>에서도 마찬가지이고, <부부일기>도 우디 앨런의 불륜은 한순간에 포기된다. <스윗 앤 로다운>에서 숀 펜(에밋 레이)의 사랑도 결국 후회만 남는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사례는 역시 <카이로의 붉은 장미>이다. 미아 패로우는 영화 속 제프 벡스터가 아닌, 현실 속 제프 펙스터를 선택하지만 꿈 같은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디 앨런은 그의 인터뷰집에서 이를 ‘광기를 선택할 수는 없다’고 언급한다.


사실 그가 지지하는 것은 현실에 관한 모종의 체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와 그 자매들>을 보면, 우디 앨런과 미아 패로우와의 사랑은 결국 성사되지 않고 그는 결국 체념하는데, 그 이후에서야 다이앤 위스트(홀리 역)를 만나게 된다. 물론 그 이후의 결말은 열려있는 것이지만, 우디 앨런은 현실을 인지하고 그 안에서 어떤 만족 같은 것들을 얻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애니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우디 앨런은 결국 다이앤 키튼과 재결합에는 데는 실패하지만 그녀와 친구가 되어 가끔 식사를 하며 옛 추억을 회상한다고 말한다. <부부일기>에서는 어린 여제자와의 불륜은 실패하지만 아내와의 관계는 회복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도 빼놓을 수 없는 사례인데, 오웬 윌슨(길 역)은 약혼자인 레이첼 맥아담스(이네즈 역)과는 파혼하고, 과거에서 만난 마리옹 꼬띠아르(애드리아나 역)과의 사랑도 실패하지만, 레아 세이두(가브리엘 역)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우디 앨런의 로맨틱 코미디가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와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 <맨하탄>의 도입부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우디 앨런의 독백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한 식당에서 우디 앨런과 그의 친구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마이클 머피(예일 역)가 예술에 대해서 잘난 척을 하자, 우디 앨런은 그에게 일부러 논쟁을 거는데, (예술에 관한) 재능은 결국 운에 달렸을 뿐이라 중요하지 않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용기’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은 이 논쟁을 아주 오랫동안 해왔던 것 같다(그리고 사실 그의 인터뷰집을 보면 우디 앨런이 실제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우디 앨런에게 체념이란, 현실에 관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한나와 그 자매들>이나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광적인 사랑의 종결되고 비참한 현실로 돌아온 이후에도 낭만적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둔 이유도 그러한 용기를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맨하탄>의 엔딩은 우디 앨런의 ‘용기’가 낙관적 결말을 허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코미디는 그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비관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그의 코미디도 허구와 현실의 경계선에서 실재하는 낭만적 사랑을 다루면서도, 그러한 것이 판타지라는 것을 인지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 이것이 우디 앨런의 방법이다.


4. 나가며: 나의 우디 앨런 감상기


내가 우디 앨런의 영화를 처음 보게 된 것은 2013년 8월, <애니홀>을 보면서부터 이었다. 당시는 이유도 없이 꽤 우울하던 시기였고, 그저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서 영화를 이따금 보고 있었다. 우디 앨런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20살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영화의 이해>에서 였는데, 그때 그냥 고전영화라고만 생각하고 언제 기회되면 보아야겠다고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서 수년 후 그냥 기억나는 옛날 영화를 한편 본 것이 바로 <애니홀>이었던 것이다. 당시 나에게 <애니홀>은 혁명적이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한 순간에 삶의 의욕이 넘쳐나고 우울함도 단번에 떨쳐냈다. 그리고서 우디 앨런의 영화를 더 찾아 보았는데, 바로 <맨하탄>과 <카이로의 붉은 장미>였다. 이 세편이 모두 너무 재미있었고, 그 이후로 우디 앨런의 팬이 되었다. 물론 모든 우디 앨런의 영화가 다 재미있었던 것은 아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우디 앨런의 영화는 영화에 따라 호불호가 강하다. 처음으로 실망했던 우디 앨런의 영화는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1972)>이다. 내가 처음으로 본 ‘<애니홀> 이전의’ 영화이기도 했다. 물론 <애니홀> 이전의 영화들도 다 재미있게 보는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호평을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당시에는 꽤 실망스러웠고, 그 이후에 본 <투 로마 위드 러브>도 내게는 실망스러웠다. 두 영화 모두 시기는 다르지만 <애니홀>과 비슷한 시기의 영화들과는 많이 다른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그림 2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본 총횟수 추이


그러나 우디 앨런의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더욱 더 빠져들게 된 것은 그러한 실망스러운 작품들을 지나고서 중간중간 나를 푹 빠져들게 했던 영화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첫번째 영화는 물론 <미드나잇 인 파리>였지만, 좀 더 분명한 계기는 <애니씽 엘스(2003)>이었다. <애니씽 엘스>는 다시 내가 좋아했던 우디 앨런으로 회귀한 듯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실망스러운 작품들도 있었고,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았던 작품들도 있었다. 이렇게 2016년 말까지 열 몇편의 영화를 보았었다. 나는 바로 이때에 어느 지인에게 우디 앨런 영화를 좋아한다고 소개를 하면서, 그에게 우디 앨런 영화를 열 몇편이나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2013년 여름부터 2016년 겨울까지, 약 4년간 열 몇편의 영화를 보았을 뿐이니,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리 자주 보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젤리그>와 그 이후에 보았던, <슬리퍼>, <사랑과 죽음>, 그리고 <범죄와 비행>은 중요한 기폭제였다. 4편의 영화를 모두 2017년 1월에 보았는데, 네 편 모두 나에게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 특히 <젤리그>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애니홀> 이후로 최고로 좋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서 ‘<애니홀> 이전의’ 영화를 보기로 작정하고서 <슬리퍼>와 <사랑과 죽음>을 보았는데, 오래 전 <당신이 섹스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보았을 때와는 달리, 그 촌스러움 마저도 아주 재미있고 좋게 느껴졌다. 나는 원래 촌스러운 영화들을 아주 싫어했는데, 이 두 편의 영화가 모두 너무 좋게 느껴지는 것을 인식하고서, 우디 앨런에 진정한 팬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들 이후로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는 것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나는 거의 수일에 한번꼴로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았고, 하루나 이틀에 한번꼴로 본 적도 수두룩 했다. <범죄와 비행>도 같은 달에 보았는데, 우디 앨런의 세계관에 대해서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사실 창피하게도 이 영화를 보기 전만 하더라도 그 특유의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어떤 영화는 재미있었고, 또 어떤 영화들은 재미없었다. 그렇게 등락을 반복하며 꾸준히 우디 앨런에 대한 동기들이 지속적으로 존재 했었는데, 올해 7월은 우디 앨런의 영화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이래저래 힘들고 피곤하고 우울하던 시기였는데, 우디 앨런은 예전처럼 나의 생활에 어떤 위안이 되었다. 나는 지난 7월 한달동안만 총 16편의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았다. 이틀의 한편 간격으로 본 것이다. 사실 그 이전에도 이래 저래 나의 정신적 건강은 그리 좋지 못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우디 앨런에게서 어떤 위안들을 얻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건 우디 앨런의 영화적 메시지와도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결국 우디 앨런의 영화를 모두 다 보았다. 사실 우디 앨런의 영화를 모두 보겠다고 다짐한 것은 수 년 전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금방 다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언젠간’ 다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가끔 그의 영화를 보았을 뿐이었다. 사실 올해 우디 앨런의 영화와 가까이 하면서, 학업이나 다른 지적 관심사와도 다소 멀어졌는데, 그래도 올해 말 개봉 예정인 그의 신작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50편의 영화를 모두 다 보게 되어서 기쁘다. 앞으로도 그의 영화는 계속 볼 예정인데, 앞으로 그가 감독이 아니라 배우로 출연한 영화들도 모두 다 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다만 50편의 영화를 모두 다 보면서, 어딘가 관심이 확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그의 영화를 모두 다 볼 것이다.


원래 그의 영화를 언젠가 다 보게 된다면, 조촐하게 라도 어떤 지적인 비평을 하나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감독을 했던 50편의 영화를 모두 다 보게 된 것이 이렇게 황급히 이루어졌고, 전문적인 비평은 아니지만, 50편을 다 본 것을 스스로 자축하는 취지에서, 그에 대한 짧은 글을 하나 쓰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Woody Allen’s Filmography



  1. 우디 앨런의 영화를 다 본 것은 지난 8월 5일, <타이거 릴리>를 보면서 였다. 그러나 그 이후, 8월 6일에는 <젤리그>를 다시 보았고, 8월 7일에는 <고양이>를 보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