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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책과 위화감

사실 위화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책읽는 것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닌데, 내가 책읽기에 그리 뛰어난 것도 아닌데, 책을 숨기고 읽어야 할까. 다들 책도 안읽고 대학 때 뭐했냐고 물어보고 싶기도 하다. 당연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위화감이 조금 억울하다. 사실 요새는 책을 별로 읽지도 않는데도 그렇다.


새로 들어간 곳에 이제 겨우 이틀 출근했을 뿐이지만, 위화감을 지우기 어렵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여기에서 국문과를 나왔다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책상에 조금 어려운 인문학 책이 놓여 있는 것을 두고, 국문과라서 책을 많이 읽는 것이냐며 (나와 동일한 신분의) 사람들이 물었다. 그녀는 그저 박사 연구위원이 자기가 재밌게 읽었다며 읽으라고 갑자기 빌려준것 일뿐라고 그러자, 다들 역시 그런 책을 취미로 읽을 리가 없다며 안도했다. 그 책의 제목은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탈근대'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책들은 '2017 트렌드'어쩌구 하는 책들이었다. - 한편 나의 상사 연구위원은 나의 성향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이시다. 소위 '운동권' 출신이기도 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나에게 처음부터 감사하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시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분과는 큰 위화감은 들지 않는데, 오히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과는 이질감이 확연하다.


며칠 전에는 반대의 경험을 했다. 문화학을 전공한 모 인물과 잠시 대화를 했는데, '요새 뭐하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바우만 신간에 대한 서평 의뢰가 들어와서 쓰고 있다'라고 말했고,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사실 그녀와는 별로 대화를 많이 해 본 것도 아니지만, 여기에는 바우만이 누군지, 그의 신간이 뭐고, 그가 얼마 전에 죽었느니 어쨌느니 하는 사전적인 설명은 필요가 없다. 나는 사실 이 짧은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속으로 묘한 유대감을 느꼈었다.


한국에서는 너무 책을 읽기 힘들다. 스무살 때는 고흐에 대한 <반 고흐 효과>라는 책을 읽자 특이한 책을 읽는다고, 그것도 과제도 아닌 책을 읽는다고 신기하다는 반응을 본적이 있다. 그냥, 지극히 평범한 책인데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그때 소설책 말고는 딱히 책을 읽지 않았지만, 반에 인문학책을 읽는다고 특이한 애라고 소문난 애가 있었다. 그저 인문학 입문서 정도 해당하는 책이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책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음악이나, 영화, 그밖에 어떤 대중적 예술양식도 그다지 진지하게 다룰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쪽에 너무나 수동적이고 한편으로는 혐오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역으로 나는 왜 이런 쪽에만 관심을 갖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S선생은 언젠가 내가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대뜸 이 위화감 내지는 고독감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공부한 사람들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고집이 센 것이 아니라, 나름의 자기논리를 가지고 주장할 뿐이고, 비판점이 있으면 얼마든지 수용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인 주장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대충 수긍할 줄도 알고 그런 것인데, 그렇지 않으니 그냥 고집이 센 것이라고. 그러니 그 사람들 말은 귀담아서 들을 필요가 없다고.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부하는 사람들 말고는 어딜 가서도 외롭다고.


이 위화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나는 게다가 두 가지 문화가 중첩되어 있다. 공부와 좌파, 두 가지. 사실 나는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이 위화감을 지울 수 없었다. 연구실 내에서는 누구도 위화감을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인물은 없었고, 학과 교수님들 중에서는 그나마 L교수님과 C교수님 뿐이었다. 이분들은 '사구체'라고 하면 그것을 좋든 싫든 알아들으셨다. 다른 교수님들은 '자본논쟁'이라는 것도 내게 오히려 그게 무엇이냐고 되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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