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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여성혐오에 대한 메모 둘: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에 대한 페이스북 관전평

이렇게까지 여론이 들끓을지는 솔직히 몰랐다. 어쨌건 간에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도 시끌시끌하다. 최소 여섯일곱명 정도 장문의 포스트+댓글을 보고서 이 글을 쓴다. 때문에 특정한 인물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현재 여성에 대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뉴스기사도 거기에 달린 댓글도 본적이 없다. 그저 뉴스를 본적이 있고, 뉴스제목을 인터넷에서 본적이 있을 뿐이다.


우선 두가지 쟁점은 개인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1) 통계적 쟁점이었다. 이 부분은 사회과학도로서 흥미롭긴 했지만, 제대로 읽지는 않았다. 특히 통계치들에 대해서 제대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나도 한번 이것저것 데이터를 확인하고 싶기도 했지만, 귀찮은 마음이 더 컸기에 그러지 못했다. 대략, 강력범죄 피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다 라는 주장과, 강력범죄의 범위에 따라 여성피해자 비율이 달라지며 경우에 따라 남성이 오히려 과반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주장, 그리고 (그것이 혐오범죄이건 무엇이건) 익명의 누군가에게 갑자기 범행을 당할 위험은 한국이 그래도 꽤 낮은 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내가 시시비비를 판단할 재간은 없다. 다만 때때로 소위 ‘진보적인’ 청년들이 데이터나 사실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고, 경우에 따라 통계치를 과장하거나 잘못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그 통계적 해석이 과대평가될 수 있더라도, 전반적인 심각성과 경향성은 훼손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쟁점이 아니다.


(2) 두번째는 피의자가 (조현병이라는)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문제에 왜 그렇게도 사람들이 집중하는지 꽤 의아하다. 병은 병이다. 정상적인 심리상태를 가진 사람이 살해를, 그것도 아무 연고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또한 피의자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점이 현재의 사건을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가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도 아니다. 물론 범죄학자나 여러 정신의학자들이 검토하여 차후 이 범죄가 ‘극심한 정신질환으로 인한 우발적 사고’라고 규정한다고 할지라도, 현재까지의 상황에서 ‘이건 여성혐오에 의한 것이 아니야’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과도하다. 나는 이번 사건이 명백한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 즉 증오범죄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설사 차후 면밀한 검토로 그러한 주장이 기각될지라도, 현재 이 문제를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라고 생각한다. 차후 다시 서술할 것이지만,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이 깊다. 현재의 사건을 여성주의 문제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우리는 종종 다음과 같은 주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 현재의 사건은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이며, (2) 이처럼 여성혐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3) 여성들은 실질적으로 여러 폭력적인 경험과 함께 실제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4) 이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네 개의 문장으로 만들어 봤지만,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짧은 형태로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형태의 주장은 하나의 비약, 하나의 모호성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1) 먼저, 이 주장은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에 의한 사건이다’, 즉 ‘여성혐오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 연고가 없은 여성을 살해했다’라는 말과 ‘한국사회에는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라는 말 사이에 비약을 저지르고 있다. (다시 주지하자면, 나는 피의자가 정신병이 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혐오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 살해를 저질렀다고 해서, ‘보라, 이 사회는 여성혐오로 만연하다’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며, ‘여성혐오가 만연하다’가 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한국사회는 여성들에게 혹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는 문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이 사회에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는 것과 어떤 남성이 여성을 증오해서 살해한 것 사이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잠시 범죄학자들이 차후에 있을 어떤 분석결과를 무시하자면) 명명백백한 것은 그저 ‘여성혐오를 가지고 있는 남성이 여성을 살해했다’라는 것 뿐이다. 말하자면 위의 주장은 강한 가정에 근거한 ‘강한 주장’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차별이 만연하고 외모품평을 하며 일상적으로 성희롱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자체가 증오범죄를 일으킨다는 주장은 충분한 근거를 필요로 하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충분히 이해하거나 납득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들에게 두가지 문장 사이의 관계는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물론 두 문장사이의 관계는 논증될 수도 있다. 사회전반적인 풍조는 어떠 어떠한 경로를 통해 극단적으로는 혐오범죄로 나타난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설득, 논증, 설명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이른바 ‘진보적인’ 청년들에게 집단, 조직, 계층, 계급의 문제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별로 당연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툭하면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고, ‘젠더’의 문제이고, ‘사회적 맥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런 표현들은 설명해야할 부분들에 설명 대신 채워지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사회적 맥락’이라는 말이 가장 납득할 수 없다. 앞선 둘은 종종 오남용될 뿐이지, 하나의 정립된 개념인 반면 ‘사회적 맥락’이라는 말은 그저 ‘그 맥락’이 어떤건지 말하지 못할 때 쓰는 미지수 ‘x’에 가깝다. 만약 이 미지수 x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 설명하는 과정이 대단히 길다면, 그것은 사실 두 개의 사건이 대단히 간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2) 나는 앞선 글(여성혐오에 대한 메모 하나)에서, 혐오가 아니라 차별의 문제를 말하였다. 물론 이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넌센스다. 우리는 여성혐오라는 화두를 시작으로 여러 차별의 문제, 여성노동에 대한 문제, 더 나아가 남성에 대한 문제까지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혐오라는 개념 자체의 문제는 여성주의 이론의 무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혐오라는 ‘말’은 몇가지 여성혐오가 존재한다는 것 말고, 별다른 설명을 제공하지도 않으며, 특별한 해결책을 ‘시사’하거나 ‘내포’하지도 않는다. (또한 다른 여성주의 이론이나 경제학, 정치경제학 이론 사이의 관계 역시 대단히 모호하거나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는 대개 ‘여성혐오가 존재한다’, ‘여성혐오하지 말자’라는 대단히 당위적인 주장 밖에는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론에 있어서 대단히 모호하게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애시당초 여성혐오가 가지는 모호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념과 통념은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우리는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임금을 받고 일하는 대신, 그 잉여가치를 착취당한다’라는 말에서 착취와, ‘그의 임금은 너무 적다. 그것은 완전 착취다’라고 할때의 착취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또한 ‘착취’라는 통념이 마르크스에게는 엄밀한 개념으로서(이것은 사실 연구자 고유의 인식론적 조작이다), 착취를 없애기 위해서는 ‘계급 관계를 타파해야 한다’라는 엄격한 결론이 도출된다. 개념도 어떤 심급에서는 모호하게 남을 여지가 있을 지라도, 개념은 여전히 ‘가능한’ 명료해야하며, 명료하지 않다면, 이론 자체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나는 여성혐오라는 말이 화두가 될 때마다, 여성주의 이론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러지 못한다면 그 운동적 성과도 일정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나의 이런 주장이나, 또는 내가 한 주장은 아니지만 여타 다른 비판들에 대해서 이런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또는 ‘이러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 ‘페이스북은 논문을 쓰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모두가 이론가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페이스북은 논문을 쓰라고 있는 곳은 아니지만, 우리는 세줄을 말하건, 열줄을 말하건, 30쪽으로 말하건, 300쪽으로 말하건, 최소한의 합리적 근거(결코 실증적 근거를 말하는게 아니다)를 가지고 말을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을 돌릴 것이 아니라, 네다섯줄 정도로라도 납득할 만한 설명과 증명을 해야한다. 또한 문제는 ‘모두가 이론가가 될 필요가 없는데, 이론가임을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이론가가 아닌데, 모두가 이론가인 척 행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이론가가 아닌데도 손쉽게 다 설명하려고 하고, 모르는 것도 안다고 말하거나,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