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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여성혐오에 대한 메모 하나: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언제인가부터, 나는 ‘최근의’ 페미니즘 담론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또한 근 1년 정도 전부터는, ‘여성혐오’ 담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말해오고는 했었다. 여러 말들을 게속 해온 터라,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녔는지, 일일히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는 이런 것이었다.

여성혐오라는 것은 오늘날 여러 젠더문제를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며, 여성혐오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모호하다 – 나는 개념과 통념은 구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개념이 어떤 심급에서는 결국 모호한 경계를 가진다고 주장할지라도, 개념은 ‘가능한’ 명료해야 하며, 명료하지 않다면, ‘이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역으로 개념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명료할 수 있는지는 결국 이론이 ‘얼마나’ 가능한지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 나아가 페미니즘적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과연 가능한가(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페미니즘 이론을 가지고 현재 한국사회의 젠더문제젠 설명하는 것은 과연 일관적인가, 등의 이야기를 해왔다. 물론 나는 페미니즘 이론을 (애당초) 잘 모르며, 관련 글을 읽어본 지도 몇 년은 지날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내가 하는 주장들에 대해서 (별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맞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최근 모 여성이 한 남자에 의해 이유 없이 살해당한 사건은 참혹한 일임이 틀림없다. 또한 왜 그런 논란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지만, 당연하게도 이 사건은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사건이었다. 워낙 요즘 혐오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기 때문에, 혐오범죄라고 명명되는 것에 일부 사람들이 반감을 가진 듯 하나, 너무나 명백하게 혐오범죄였고, 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명백한 ‘증오범죄’였다.

여성혐오라는 낱말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안타까운 사건은 ‘여성 혐오가 바로 여기 실재한다’라고 말해주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때문에 이 글은 끔찍한 사건을 앞에 두고서야 쓰게 되는 나의 자기변론에 가깝다. 여성혐오는 그 개념적 모호성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실재한다. 비참한 사건은 추상적인 관념이 폭력적으로 나타난 것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이런 사건은 이미 그 전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잊혀졌거나, 묻혀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생각은 기존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여성혐오에 대한 어떤 선전문구에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여성차별이 아니라, 여성혐오다, 라는 것이다. 나는 이 문구가 그 자체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숱한 문구 중에서 하나의 문구에 지나지 않겠지만, 젠더문제에 대한 여러 담론들이 ‘차별’에서, ‘혐오’로 빠른 속도로 환원된 것은 사실이라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소 위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차별이 아니라 혐오가 아니라, 혐오가 아니라 차별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문제가 양자택일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늘 여성혐오가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돌아오는 대답 중 얼마전에 이런 말이 있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내심 별로 할말이 없었지만, 사실 인상적이었다. 여성을 혐오하는 (…) ‘정서’,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여성혐오가 복잡한 개념이 아니듯,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답이었기에 더 의문이 들었다. 구체적이고 지나친 수준의 행동이 아니라면, 애당초 그런 개인의 정서나 감정은 제어될 수도, 통제될 수도 없다. 개인의 정서나 감정을 규제한다는 생각자체를 우리는 민주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성혐오를 가진 ‘유명한’ 예술가들이 여전히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대신에 우리가 정책적으로 실효성을 가지는 것은 혐오가 아니라 차별의 문제다. 우리는 역량에 한해서 차별을 시정할 수 있고, 최대한 효율적인 시정방법을 모색한다. 

나는 여전히 혐오라는 개념이 불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