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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후기: 바이론 하워드•리치 무어, <주토피아>, 2016


<주토피아>를 봤다. 확실히 미국은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간단하다. 토끼는 연약하다는 편견을 이기고 경찰이 되어 범죄를 소탕하고, 그의 파트너, 여우도 사악하다는 편견을 이기고 그를 도와 범죄를 소탕한다.


다양한 동물들이 함께 어울려 지내는 대도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종의 용광로, 미국이고 또 대도시 주토피아는 바로 뉴욕이다. 심지어 토끼는 아이폰을 쓰고, 좁다란 창문의 대도시 아파트에서 생활을 한다. (영화, <대부>를 포함해서 다양한 오마쥬들은 그 장소가 바로 미국임을 강조한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대도시에서 놀랍도록 잘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그것은 고도화된 커스토마이징에서도 그것은 드러난다. 목이 긴 기린을 위한 쥬스라거나, 작은 생쥐를 위한 출구, 동물 키에 따른 지하철 손잡이 등. 토끼는 자신을 귀여워하는 동료에게 ‘다른 동물에게 귀엽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다소 불편하다’는 대사를 하고, 뚱뚱한 표범(?)은 사과를 하는데,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다. 뭐 잡다한 이야기는 귀찮으니 하지 말자. 어쨌든 대도시 주토피아는 그런 곳이다.


하지만 차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존한다. 양은 사자 시장의 비서역할을 맡으며 그저 얼굴마담 역할만 해야한다거나, 토끼는 경찰이 되었지만 주차단속이나 해야했다거나, 여우에게는 아이스크림을 팔기를 거부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심지어 이 차별은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며 더욱 공고화되고 재생산되었다. 물론 영화는 이 차이는 결코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며, 그저 우리의 편견이었을 뿐임을 교훈처럼 알려준다. 하지만 그 사실을 토끼 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육식동물은 원래 생물학적으로 다른 동물을 공격한다고 기자들 앞에서 선언하자 도시는 순식간에 차별이 만연해진다. 이 장면은 아주 인상적인 부분이라고 할만하다.


그래서 결국 다양성을 존중하자, 생물학적인 특성에 의해서 누군가를 차별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실 생물학을 빙자한 우리의 편견일 뿐이다, 대략 그런 내용이다. 이런 주제를 애니메이션으로 그것도 저렇게 위트있고 유쾌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디즈니와 할리우드, 그리고 미국의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작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디즈니, 픽사, 그리고 드림웍스에는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이 많다. 그래서 한편으로 대단히 미국적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한편으로 어떤 아쉬움도 남는다. 사실 이 아쉬움을 쓰기 위해서 이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다양성이 존중되고, 토끼도 경찰이 될 수 있다는 꿈을 이루어줄 주토피아에서도 사실 차별이 상존하고,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과 벽이 존재한다는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들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부분들이 일면 계급, 계층적인 요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토끼는 늘 홍당무 농장이나 해야했고, 여우는 변변찮은 직업을 구할 수 없었으며, 양은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육식동물은 10%에 불과했지만, 요직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것이 특정 동물이었기에 차별받고, 또 우대받는 것이라면, 보이지 않는 ‘신분’이 존재함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자가 잡혀가고, 맹수들이 오히려 차별받는 시대가 돌아오면서부터, 계급/계층의 문제는 빠르게 실종되고, 단순히 누구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으로 환원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자 뒤에 있던 ‘진정한 악당’이 그동안 일을 꾸민 동기도 이 문제를 실종시키기에 충분했다. 경제적인 문제는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교훈마저도 대단히 미국스럽다고 할만하다. 다양성 정책을 실시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차별을 결국 다시 차별하지 말자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이다. 물론 내가 단순히 아동 애니메이션을 두고 큰 기대를 건 것일 수도 있다. 아동은 아동다워야 했으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