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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독서노트: Althusser, Louis. '프로이트와 라캉'.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1994



Althusser, L. (1994). “프로이트와 라캉”.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역). 솔.


철학에 대해서 내가 깊이 있게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피상적으로나마 몇자 적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글을 쓴다. 다음은 솔 출판사에서 출판된 『아미엥에서의 주장』 중 「프로이트와 라캉」에 대한 간단한 독서노트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프로이트는 마르크스(그리고 니체)와 함께 19세기의 사생아다. 아버지도 없고 자연 그 자체가 어머니였던 사생아 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을 창조하였고, 이는 시대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 환대는 유감스럽게도 프로이트의 혁명적 성과를 훼손하는 것들이었다. 그 훼손은 생물학으로 심리학으로 사회학으로 경제학으로 철학으로 환원되어 훼손되었다.


라캉의 작업이 혁명적인 것은 프로이트가 만들어낸 작업이 가지는 특수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환원되지 않은 프로이트의 작업을 복권하고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그가 프로이트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획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이러한 작업을 논하는 까닭은 물론 마르크스로 되돌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가지는 혁명적 유산이 가지는 고유성에 대해서, 논하기 위함이다.


다음은 몇가지 구절들에 대한 나의 코멘트들이다.


p.18. (•••) “우리는 이러한 악용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분석의 수정주의의 존재에 의해 그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 이데올로기로의 타락은 정신분석의 생물학주의, 심리주의•사회학주의로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pp.23-24. (•••) “라깡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 원칙에 있어 프로이트는 하나의 과학을 확립했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 즉 새로운 대상인 무의식에 대한 과학이다. / 정확한 진술이다. 정신분석이 하나의 과학이라면, 이는 그것이 고유한 대상을 가진 학문이기 때문이고, 또한 모든 과학의 구조에 부합하는 하나의 과학이기 때문이다.”


p.26. (•••) “우리는 현시대의 정신분석, 특히 아메리카의 정신분석의 한 분파 전체가 그 폐기물의 이점을 맛본 이론의 유치함, 유년기로의 추락을 넘어서서 프로이트로 되돌아가야 한다. / 이러한 유아기로의 추락은, 현상학자들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이름인 심리주의와 – 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실용주의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정신분석의 근대사는 라깡의 판단을 예증해준다. (•••) 즉 행동주의적(달비에)이건 현상학적(메를로-뽕띠)이건, 실존주의적(싸르트르)이건 심리학에 또는 어느 정도 잭슨적인 생체신경학에, ‘문화주의적’ 혹은 ‘인류학적’ 형태의 ‘사회학’(미국에서 지배적인 경향, 카디너, 미드 등)에, 그리고 철학(싸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정신분석 비스방거의 ‘존재 분석’)에 정신분석을 병합시킨다는 조건하에서만 정신분석과 평화공존협약을 체결하는데 동의하였다”


p.27. (•••) “그리하여 정신분석 전체가 신경학•생물학•심리학•인류학•철학의 잔해들을 조리하는 기술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러한 학문 분야들로부터 진정으로 그것을 구별해내어 정당하게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고유한 것으로서 그것에 남는 대상은 무엇인가?”


p.32. (•••) “라깡은 새로운 학문인 언어학의 출현이 없었다면 그의 이론화의 시도가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pp.37-38. (•••) “이로부터 살아 있는 아버지가 없어도, 아버지(법), 따라서 인간적 기표의 질서, 다시 말해 문화의 법칙의 현실적인 존재라는 것이 시작되고, 언제나 이미 시작되어 왔다. 그것은 모든 담화의 절대조건이 되는 담화이고, 거시적으로는 실재하지만, 다시 말해 그것의 심연 속에서는, 모든 언어담화에서는 부재하는 담화이고, 이 질서의 담화, 이러한 질서 그 자체인 타자, 위대한 제3자의 담화이다. 즉 무의식의 담화이다.”


인용한 내용들은 본문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만, 나는 다소 순서없이 말을 이어가고자 한다.


인용된 글들 중에 각종 프로이트에 대한 훼손을 다루는 내용이 가장 많다. 알튀세르는 과학과 부르쥬아 이데올로기를 구분하고, 부르쥬아 이데올로기로부터의 단절된 마르크스 고유한 성격을 말한다. 여기서는 프로이트를 예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부르쥬아 이데올로기와의 이론적 투쟁에 있어서 철학은 과학에 봉사하며, 과학은 (정치 일반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정치와 관련을 맺을 때 비로소 과학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적인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공교롭게도 오늘의 나는 알튀세르의 구분법들이 다소 악의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그가 수정주의나 유아기적 타락이라고 비난하는 대상들은 한편으로 경험주의나 실용주의로서 사실 건전한 과학관일 수 있다. 사실 어떠한 학문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 과학의 혁명적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현대적인 다시 말해서 보다 마지막으로 조속히 따라잡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마르크스경제학의 과학성을 의심하는 이유는 어떠한 주장이 마르크스가 논한 바와 다르기 때문도, 그가 주장한 어떠한 본질로부터 괴리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진정 아니다. 마르크스의 위기는 마르크스로 되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사실 근본주의적 시각들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악의적인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 어떠한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훈고학도 청년기 마르크스로부터 성숙기 마르크스를 단절시키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 적자와 서자는 누가 더 힘이 센지를 통해서 구분될 뿐이다. 또한 과학에 있어서 힘은 현실설명력이다. 따라서 케인즈의 적자는 포스트케인지언이 아니라 오늘날 뉴케인지언일 뿐이다. 아담 스미스의 후예가 존 롤즈(?)가 아니라 신고전파이고 왈라스와 애로우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실 아담 스미스와 거의 관련이 없어도 좋다. 더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어쩌면 우리는 피케티에게 감사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피케티가 마르크스를 의도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찬양했다면, 마르크스의 적자는 피케티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피케티가 어떻게 마르크스를 훼손했건, 그로서는 『21세기 자본』의 서문만 고쳐써도 되었을 일이다.


본문의 곳곳에서 알튀세르가 실증주의를 명시적으로 비판하는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들 모두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알튀세르의 당시로서도 미국의 계량경제학은 상당한 발전을 했을 시기지만, 그래도 지금에 비하자면 상당히 조야한 상태였을지 모르고, 그로서는 무시할만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을 그가 살고 있어도 태평하게 무시하고 있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도 말하듯이, 마르크스는 기존에 존재했던 헤겔의 언어를 통해서 역사과학을 정초했듯이, 라캉이 언어학을 통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듯이, 우리는 현재 우리가 쓸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알튀세르의 언어로 말할 이유조차도 없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