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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학설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들



0.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최근 페이스북에서 몇가지 사건을 봤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키워’였고, 나는 나대로 생각나는 것들을 쓰고 싶었다.


1. 


경제학설사에 대해 말하고자 하였으나, 경제학에 대해서부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에 학문적인 관심이 생겨난 것은 언제, 그리고 왜 였을까. 얼마 전 모 선생님과 술자리에서 이래저래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내가 언제부터, 그리고 도대체 왜,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여러 말들을 할 수 있겠지만, 대학교 1학년 1학기때부터라고 말하는 것이 우선은 솔직한 대답이다.


나는 경제학과가 아니라 사회과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경제학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수학과 돈으로 점철된, 말하자면 최악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은 학과제에서 학부제로 바뀐지 오래되지 않았고, 사실상 학과제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입학식도 하기 전 오티날 학생들에게 학과를 고르도록 했고, 나는 취업이 잘된다는 말에 덜컥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경제학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나는 1학년 1학기 때부터, 경제학이 꽤 재미있었다. 경제학원론1 첫수업이 기억난다. 지금은 퇴임하시고 시민운동을 하시고 계신 김모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김모 교수님은 첫수업 날 물과 다이아몬드가 가지는 역설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이른바 스미스의 패러독스. 그날 교수님은 첫수업이라서 경제학이 재밌는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그 다음부터는 재미없을 것이라고 했고, 정말로 그랬다.

어쨌거나 나는 그 수업이 꽤 재미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나는 경제학의 시작을 경제학설사로 시작했다.


2. 


그 다음으로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 마르크스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실 나는 학설사를 공부하는 전형적인 루트를 따랐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위 세대처럼 마르크스를 공부하기 위해 학설사를 공부하지는 않았다. 혹은 마르크스를 공부한다고 말하기 싫어서 학설사를 공부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나는 학설사가 그 자체로 재미있었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몇년전 학부 때, 모 세미나 모임에서 한 박사과정 선생님은 나에게 ‘왜 학(설)사를 공부하냐’고 물었다. 그때 사실 나는 대뜸 물어보시길래 ‘학사’가 뭔가 싶어서 어버버 했다. 갑자기 말을 거셔서 당황한 것도 있었다. 뒤늦게 학사의 의미를 깨닫고, 이론을 상대화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학설사를 좋아하는 데에는 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나는 늘 지식이나 이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말하자면 그것이 내 취향이었다. 경제학이 신학적이라고 느꼈던 점도 있었다. 나는 다분히 프로테스탄트적인 가정에서 자라왔고, 경제학은 주류든 마르크스든 그러한 윤리와 친족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은 내가 정치외교학과나 사회학과가 아니라 경제학과였고(사회학을 복수전공하긴 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는 점점 사회학이 아니라 경제학과가 되어갔다), 때문에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을 비교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던 탓도 있는 것 같다. 또한 그러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 내부 및 다른 학파들에 대해서도 폭넓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학설사를 관심있게 읽게 되었다.


3.


나는 한동안 학설사에 대한 이러저러한 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동안 하다가 그러한 공부에 대해서 꽤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종의 ‘요약’공부가 그것이었다. 학부 때는 그러한 요약공부를 긍정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다소 위악적으로 표현했었는데, 나는 그것을 종종 ‘스탈린’식 이라고 불렀다. 마치 ‘5단계설’처럼 말이다(나는 스탈린식의 해석이 얼마나 마르크스의 것과 다르지 않은지를 보이기 위해 서한집이나 엥겔스의 반뒤링론에 대해서 훈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왜곡과 정통의 차이는 명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여러 학파들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해내는 일은 동시에 아주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자본론 읽기모임에서, 그리고 내가 운영하였던 학설사 세미나모임에서 원전을 직접 한줄씩 읽었던 경험은 요약공부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원전은 아마 아우라가 있었고, 그건 발견되는 것이었다). 요약된 것을 읽는 것과 원전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고, 때때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때문에 나는 사실 자본론 읽기모임을 운영했던 모 단체에 분명히 혜택을 받은바 있다. 특히나 간사를 맡으신 모 선생님은 아주 성실하고 꼼꼼하게 주요한 논쟁들을 빼놓지 않았고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응해주셨다. 비록 나는 현재 그 단체의 많은 주장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때로는 희극적으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기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요약공부의 한계는 그밖에도 다양한 층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학설사는 학파의 주장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불합리한 요약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때로는 강박적인 모습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학설사를 공부하다보면, 또는 학설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학파는 이런 주장을 하므로, 반드시 이렇게 주장해야 한다’와 같은 오류들을 범하게 된다. 상당부분은 이런 경우 무지로부터 유발되기도 한다. 한번은 모 비전공학생이(그는 공학도였다) 경제학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다른 이른바 사회학도들은 이러저러한 자신이 배운 학설사적 내용을 요약해주었으나, 나는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완곡하게나마, 사실상 경제학은 케인즈주의와 신고전파로 양립되지 않는다고 말해야했다. 그런 의미에서 학설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일종의 ‘이념형’을 공부하는 것이고, 현실에서 그러한 이념형에 꼭 들어맞는 경우를 찾는 것은 드문 일이다. 때문에 학설사를 근거로 하는 논쟁은 저마다 자기가 원하는 유령을 앞에 두고서 그 유령을 때리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4. 


나는 사실 요즘 이론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줄었다. 그보다 경험분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설사를 조야하게 정리하는 것 대신에 어떤 입장에서건 그것을 지지할 경험적 증거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학설사를 공부하다보면 놓치기 쉬운 점이기도 하다. 근래에 읽은 Kim, K. (1988). Equilibrium business cycle theory in historical perspective. (C. D. Goodwin,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은 나의 이러한 생각을 더욱 재생산하고 있다(공교롭게도 내가 최근 쓴 글들은 전부 그 주제가 무엇이건 전부 경험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끝맺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input이 필요해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