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냥 노트

수학에 대한 일기 혹은 단상



제목을 이렇게 정했으니, 수학에 대한 옛날 이야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 싶다. 보통 사람들은 수학을 싫어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 내가 수학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또는 수학을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예전에는 수학을 잘한다고 생각해왔었다. 그게 중학생 즈음이었고, 또 동시에 그 무렵 수학을 못한다고는 생각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그때 생각을 되새겨보는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즈음 당시 TV에서 방영하던 영광의 레이서, 그리고 사이버 포뮬러를 즐겨봤었다. 아마 영광의 레이서는 제목이 번안되었던 것 같다. 다른 소년만화들이 으레 그렇듯이, 사이버 포뮬러에서도 선악 구도가 존재했었다. 주인공은 선한 입장에서 나쁜 악당들의 반칙에도 불구하고 1등을 거머졌다. 그리고 악당들은 2, 3, 4위를 차례로 했었는데, 어린 나는 그 에피소드가 정말 인상적이었나 보다. 악당들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생각해보니 문제가 조금 있었다. 주인공이 1등이라고 하지만, 악당들은 2위부터 3, 4위를 했고, 4, 5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올림픽으로 치면, 은메달과 동메달을 빼앗긴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당시 욕조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다. 1등이 1점이라면, 2등은 1/2점, 3등은 1/4점, 4등은 1/8점 (…) 인데, 그래서 2, 3, 4, 5 (…)위의 점수를 다 합쳐도 1위의 점수가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물론 나는 당시 극한의 개념을 알지 못했고, 무한히 더하더라도 1위 보다 명백히 낮은 점수라고 생각했다. 사실 분수라는 개념도 알지 못해서, 색종이 한장, 색종이 반장, 색종이 반의 반장이라고 표현했었다. 덕분에 기하학적으로 생각을 했기에 덧셈은 간단했다. 악당은 주인공의 색종이 한장을 넘을 수 없었다.

그랬었다. 때문에 나는 수학을 잘한다고 생각했었다. 중학생 즈음에는 여러종류의 논리퀴즈 같은 걸 풀기를 좋아도 했었고, 등등.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즈음이었나, 그때 중간고사 수학시험 점수가 처참했었다. 그리고 엄마가 내 점수를 보고 상당히 충격이 컸나 보다. 엄마가 아는 한 지인에게 수학과외를 한동안 받았다. 나는 극구 반대했었지만, 결국 받았고, 뭔가 강제로 보충수업을 받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부터 나는 수학을 못하는 아이가 된 것 같다. 실제 내가 어땠는지와 무관하게 내 스스로에게 말이다.

사실 이런 글을 쓰게 된 사소한 사건들이 있었다. 먼저 오늘 아침에 어떤 사람의 페이스북 글을 읽었다. 그는 비주류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 사람이 길게 써놓은 글을 별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납득할 수 없다는 말이기 전에, 정말 이해가 안된다. 전개가 갸우뚱 하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내가 별로 언급할 내용은 없다.

그리고 며칠 전에 한 지인에게 그런 말을 들은적이 있다. 그는 마르크스와 수학에 대한 글을 읽은 직후였다. 자신은 ‘경제학자들이 수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 속으로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으나,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단지 아주 원론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미분을 공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되며, 자본론에도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분모를 아주 0에 가까운 값으로 나누는 것을 서술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자본론 읽기 모임에서 어느 선생님이 내게도 한 바 있다. 그분은 나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감추지 않았는데, 내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Roemer나, 특히 한국의 모 교수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 그러했다. (Roemer에 대해서는 지금도 그때도 관심이 크게 있지는 않은데, 당시에 Roemer를 말했던 것은, 모 교수님이 내게 Roemer의 제자였던 모 교수를 언급했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르크스의 미분학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그가 비판하는 그 모 교수의 책에서부터였다. 

쓸데 없는 신변잡기가 길었지만, 이들이 말하는 바는 간단하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나는 수학은 철저히 도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아마 다른 학문에서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다만, 수학자의 입장은 어떠해야할지는 잘 모르겠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좋은 사례가 있다. 옛날 이야기인데, 한 수학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직접들은 것은 아니고, 그 사람 밑에서 일하던 직원으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수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자연계에는 수학적 원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학자이니 만큼 다소 표현의 과격함이 있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짧은 말에 있어서도 아주 명백히 반대한다. 그건 절대로 틀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학은 방법이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렇다. 만약 그 수학자의 말대로, 자연계가 수학적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지적 작업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학적 원리에 대한 발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인간의 지적 작업은 단지 자연계에 존재하는 어떤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생산이다. 때문에 심지어 어떠한 수학적 원리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즉 수학적 원리는 그 자체로 자연계에 존재하는 실재라기 보다는 구성적 실재에 지나지 않는다. 여타 다른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렇다, 어쩌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수학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아직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 오직 근사적인 방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학은 그 자체로 방법이고 수학자가 하는 일은 여러가지 방법을 발전시키는 일종의 공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공학은 ‘좋은 것’이다. 그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원칙적인 주장이 현재 비주류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수학적 방법을 고도화시키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적이지 않으면 과학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경험적이어야 하는데, 수학은 그것을 위한 훌륭한 도구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의미로 나는 앞선 선생님들의 입장을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아담 스미스의 글은 과거에는 과학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보듯이,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더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DSGE도 미래 과학자에게는 학설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만 흥미로운 멍청한 21세기 사람들의 웃기는 장난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경제학의 모든 연구들이 다 경험적인 것만도 아니다. 다만 그러한 연구들도 다른 여러 경험적인 연구들과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주류경제학도 어떠한 트릭을 통해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류경제학의 현란한 수학적 모형들에 대해서 심도깊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지나치게 한정될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때문에 내가 좀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기를 정말 원한다). 그러한 주류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트릭에 대해서, 어깨너머로 주워들은 내용들도 있고, 내가 혼자 추측성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들도 있다. 일종의 트릭이다. 그리고 아마 마르크스에게 말했다면, 그는 이 트릭을 ‘물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때문에 경제학이 가지고 있는 이 물신화를 폭로하는 것도 이론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가치있고 흥미로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이 트릭이 그 자체로 ‘저주’받아야 할 어떤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때때로 혹자들이 혹은 내가 비판하는 어떤 트릭들은 사실 그저 쿤이 말하는 것과 같이 패러다임이 변한 것일 뿐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어쩌면 마르크스의 그것들도 일종의 트릭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경제학 이론에 존재하는 트릭을 걷어내고 남는 것이 바로, ‘직관’이라고 말한다. 조금씩 맥락이 다를지 모르나, 경제학자들이 수학자나 공학자와 다르다고 자부하는 것도 바로 이 직관에 대한 것이다. 공히 수긍하는 내용들이나, 이러한 발화의 프레임 자체가 나로서는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경험적이어야 한다는 내용은 온데간데 없고, 경제학 논쟁사를 ‘contents’냐 ‘styles’이냐로 환원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경제학은 고도의 수학화를 달성했고 그러나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들 자체에서 우리는 경험연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지, 아무런 것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덧붙여서, 구체적으로 쓰지 않았지만 내 생각은 Sims의 주장과 유사한 것 같다).

때문에 수학이란 것은 필요하면 하면 되는 것, 그리고 기왕이면 한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