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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노트

후기: Ernst Lubitsch, <The Oyster Princess>, 1919



에른스트 루비치의 <굴공주>를 보았다. 1919년작이다. 별로 할 말은 없지만,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몇 마디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영화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처음으로 본 영화는 1940년작, <모퉁이 가게>이다. 물론 1919년작은 무성영화이고, 1940년작은 유성영화이다.


<모퉁이 가게>는 1998년 노라 애프론의 <유브 갓 메일>의 원작이다. 노라 애프론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유브 갓 메일>,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 <그녀는 요술쟁이>를 찍은 로맨틱 코미디의 대표적인 감독이다. 그리고 몰랐는데, 방금 검색해보니, 우디 앨런의 <부부일기>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모퉁이 가게>는 사실 <유브 갓 메일>을 본 직후에 봐서 그런지, <유브 갓 메일>과의 유사점들만 눈에 들어왔다. 꽤 재밌었지만, 그렇게 인상깊은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굴공주>가 무척 재미있었고, 덕분에 <모퉁이 가게>도 다시 돌아보게 되고, 괜히 <모퉁이 가게>에 대한 애착도 생기기 시작했다. <모퉁이 가게>에서의 훅포인트는 물론 여러 개 있을 수 있지만, 남자 주인공이 ‘오다리’라고 하자, 여자 주인공이 오다리를 보여달라고 하고, 남자 주인공이 바지를 추켜 들어올리는 장면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꽤 귀엽게 나오는데, 1960년작 빌리 와일더의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에서 흉터를 보여준다고 남자 주인공이 바지를 추켜 들어올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정말 <굴공주> 이야기를 하자. <굴공주>는 어느 대부호의 딸이 구두약 공장주의 딸이 백작과 결혼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아버지에게 ‘왕자를 사달라고’ 떼를 쓰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왕자를 사준다’며, 중매업자를 통해 왕자를 주선하는데, 중매업자가 찾아낸 왕자는 몹시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들도 있는데, 대략 영화의 내용은 이런 내용이다.


영화는 농담들로 가득하다. 대사를 통한 첫번째 농담은 아버지와 딸과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딸이 화분을 깨고 집안의 온갖 물건들을 던지며 난리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딸을 찾아간다. 아버지가 방문을 들어갔다가 그녀가 던진 신문에 맞는다. 아버지는 ‘딸아, 왜 신문을 던지니?’하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꽃병들은 모두 깨져버렸으니까요!’. 나는 이 농담을 보자 마자, 우디 앨런의 농담과 닮았음을 알 수 있었다. 우디 앨런은 흔히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이 농담 때부터 빠져들었다.


<굴공주>에서 에른스트 루비치의 농담들은 사랑과 돈에 관한 것에 집중되어 있다. 부르주아 대부호의 생활은 우스꽝스럽고, 또 그들의 속물성은 노골적이다. 왕자는 사고 팔리며, 또 그 왕자는 가난에 허덕거리면서도 ‘고고함’을 포기하지 않고 허세를 부린다. 물론 부르주아 대부호에게 그의 ‘고고함’은 가볍게 무시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랑 조차도 지극히 속물적으로 그려진다. 결혼이 그저 대부호에 의해 ‘구매’되는 것은 물론이고, ‘외모’ 역시 노골적으로 고려된다. 이들은 왕자의 하인을 왕자로 착각하고, 그 하인도 그들이 자신을 왕자라고 착각하자 왕자행세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중매쟁이는 왕자가 매우 잘 생겼다고 했지만, 그의 하인은 못 생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하인이 왕자라고 하니, 대부호의 딸, 여자 주인공은 그와 결혼한다. 결혼은 아주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데, 자신의 아버지가 잠을 자자, ‘이렇게 사소한 일로 아버지를 깨울 필요가 없다’며, 그냥 둘이 교회에 가서 진행한다. 또한 못생긴 그를 옆에 앉히기 싫어서 마차의 뒷자리에 앉히고, 그의 하인들 앞에서 대놓고 그에게 모욕을 준다. 물론 그와 잠자리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술에 취한 진짜 왕자를 만나게 된다. 그를 본 수 많은 여자들은 서로 그를 갖겠다고 다투는데, 급기야는 권투를 해서 최종적으로 이긴 사람이 그를 갖기로 한다(여자들이 권투를 해서 남자를 차지한다는 설정도 아주 인상적이다). 물론 우리의 여주인공이 최종 승자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자신의 방에 술 취한 왕자를 데려온다. 그리고 그를 간호하고, 다음날 아침 그가 술에서 깨서는 서로 키스를 주고 받는다. 여자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에 낙담하지만, 이들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왕자는 ‘달콤한 말들’로 여자에게 사랑을 이야기한다. 물론 결말은 그가 진짜 왕자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둘이 ‘이미’ 결혼했던 것이므로,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돈과 귀족적 신분이라는 ‘고고한 것들’은 속물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폭로되고 희화화되며, 사랑이라는 것도 술주정뱅이 남성과 철없고 속물적인 여성의 ‘불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세계관이 우디 앨런의 것과도 지극히 닮아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 ‘비극들’은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을 통해 ‘봉합’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낭만주의’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 낭만주의가 정치적으로나, 혹은 다른 측면에서, 내가 긍정할 수 있는 것인지는 사실, 계속 고민으로 남고 있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도 늘 마찬가지였다.


굴공주는 유튜브에서 전체를 다 볼 수 있다(고화질로 다시 보고 싶다).